기해 진연의궤(1719년)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년)의 기로연(耆老宴) 미수(味數)상차림 고찰
Abstract
The Royal Culinary Guide Book is a recording of royal rituals and a register of the procedure of banquets and the side dishes that were served. The current research examined the differences between the 「Kihae Jinyeonuigwe」 in 1719 and the 「Imin Jinyeonuigwe」 in 1902, which have a common meaning of the celebration of entering (doing ipso) the Giroso, through a comparative analysis of the Misu Table Sets included in the two jinyeonuigwes. The Misu Table Set, which is served along with the hyeonsu(獻壽), where cups of liquor are offered to the main guest wishing for his longevity during the banquet, is a table set served from one time (il mi) to nine times (gu mi), of which the times of serving and the number of foods served vary according to the Royal Guide Book. The current research surveyed the Misu Table Set of five times (o mi) served to the king and the crown prince at the Banquet for the King (Daejeonjinyeon) at Gyeonghyeondang of Gyeonghuigung on September 28, 1719, as recorded in the 「Kihae Jinyeonuigwe」, and the Misu Table Set of nine times (gu mi) served to the emperor and the crown prince at the Banquet for the Outside Guests (oejinyeon) at Hamnyeongjeon on April 23, 1902, as recorded in 「Imin Jinyeonuigwe」. Even the foods with the same names differed in their composition of the ingredients. Through this, the chronological differences of over a century and the seasonal differences of the banquet could be analyzed. The results of the current research indicate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the royal court cuisine of the Joseon dynasty. They are expected to contribute to research on the chronological changes to the food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as basic material.
Keywords:
Jinyeonuigwe, giroyeon, misu, Kihae Jinyeonuigwe, imin hamnyeongjeon jinyeonuigwe키워드:
進宴儀軌, 耆老宴, 味數, 己亥進宴儀軌, 1719, 壬寅 咸寧殿 進宴儀軌, 1902서 론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유교적 실천윤리를 기반으로 하였다(Park SH 2000). 주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효행정표제(孝行旌表制), 양로연 설시(養老宴 設施), 기로소제도(耆老所制度) 등의 기로정책(耆老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Park SH 2000).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기로연(耆老宴)으로, 이는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실현 내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Park SH 2000).
기로소(耆老所)는 나이 많은 임금이나 실직(實職)에 있는 70세 이상이고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마련한 일종의 경로소(敬老所)로서 이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의 초상을 걸어두고 전토(田土)와 노비가 하사된다(Lee SW 1985). 기로연(耆老宴)은 기로소에 등록된 전·현직 문신관료들을 위해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국가정책의 하나였다(Cha YR 2015). 양로(養老)와 군신(君臣)간의 신의를 강조하며 태조(太祖)부터 고종대(高宗代)에 이르기까지 전 왕조에 걸쳐 설행(設行)되었으며, 이는 왕권강화와 교화의 목적을 바탕으로 한다(Lee HJ 2007). 기로연은 정치적 목적과 사회현상에 따라 달라지며(Lee HJ 2007), 군신의 관계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의례로 볼 수 있다. 기로소 입소는 70세 이상 문신 정2품 이상의 실직에 있는 관리만이 가능한 것으로 장수와 영예를 나타내는 일이었다(Na DS 2014). 당대 왕 가운데 태조(太祖), 숙종(肅宗), 영조(英祖), 고종(高宗)만이 기로소에 입소하였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족의 회갑, 탄신, 사순, 망오, 망육 등의 기념일과 존호를 받을 때, 그리고 왕께서 기로소 입소 시에도 잔치를 열었는데, 그때 차리는 음식을 ‘연회식(宴會食)’이라 한다(Lee SY & Han BR 2012). 한국음식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조리가공법, 상차림의 양식, 여러 의례의 관행 등에서 전통을 확립하였다(Lee HG & Yoon SS 1985). 그 중에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음식 상차림은 당시의 음식문화의 한 집체라고 할 수 있다(Lee HG & Yoon SS 1985). 특히 연회식 상차림은 물량, 기술, 의례 등에서 가장 풍부하며, 이러한 연회의 전말과 음식의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의궤가 있다(Lee HG & Yoon SS 1985). 연회식이 기록된 의궤는 국내 현존하는 20종과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중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 1630)를 포함 총 21종으로 전해진다(Lee SY & Han BR 2012). 이들 연회식의궤 중 기로연과 관련 있는 것은 숙종 45년 기해 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 1719), 영조 20년 갑자 진연의궤(甲子 進宴儀軌 1744), 광무 6년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壬寅 咸寧殿 進宴儀軌 1902)이다.
연회식 상차림은 정해진 의주에 맞추어 마련되어 연회의 절차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 규모와 의미를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Chung HC 2015b). 특히 주빈을 위한 음식상은 왕실의 위의(威儀)와 유교적 차서(次序)를 드러낸 상징물로 작용하였다(Chung HC 2015b). 이러한 음식상은 오늘날 실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연회 거행 시점에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로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할 수 있다(Chung HC 2015b). 이들 연회식 상차림 중 미수(味數)는 주빈에게 술을 올리며 시간전개형으로 등장하는 음식상이다(Chung HC 2015a). 미수(味數)상차림은 헌작수와 동일하거나 2회 적게 마련되었으며, 헌작수에 따라 여러 상을 마련하였다(Chung HC 2015a). 때문에 미수(味數)상차림은 실제 시간의 흐름과 다양한 사회현상에 따라 변화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Chung HC 2015a). 미수(味數)는 술의 헌수에 따라 점진적으로 시간축에 의해 배선되는 술안주 상이며,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에 전개되었다(Kim SB 2003). 한대(漢代)에는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보여주고 있는 초미(初味), 이미(二味) 등의 미수(味數)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Kim SB 2003). 그러므로 미수(味數)상차림은 공간전개형의 대선(大膳), 소선(小膳), 연상(宴床)등과 함께 중국과 한반도의 연향 음식 문화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Kim SB 2003).
본 연구와 관련된 선행연구들을 살펴보면, Chung HJ(2015a)는 조선후기 예연(禮宴) 음식상의 의미와 실체와 변화의 실상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규명하였고, 연회의 과정을 날짜순으로 등록한 등록(謄錄)의 연회음식을 고찰한 것(Lee SY & Han BR 2012), 기축진찬의궤의 상차림 중 자경전정일진별행과에 관한 문헌적 연구(Kim HY 등 2015), 영접도감 연향색의궤(1634년, 1643년)를 통하여 1600년대의 궁중 연향의 식생활 문화에 관한 연구(Kim SB & Lee SW 1992) 등 이었다. 또한 기로연 의궤와 관련된 연구로는, 1719년 숙종의 기로연 행사에 관련하여 기로연 이전과 이후의 행사와 의주에 관한 연구(Kim MS 2008), 조선시대 기로연에 사용된 기물에 관한 연구(Cha YR 2015), 숙종실록과 숙종조 기해진 연의궤를 중심으로 숙종조 진연의 공연문화에 관한 연구(Park JR 2007) 등 주로 의주 및 사용된 기물 그리고 공연사료적 가치에 관한 연구들이 대부분이고, 기로연에 사용된 연회 음식과 관련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축하하는 공통의 의미를 지닌 기로연을 주제로 한 의궤인 ‘숙종 45년 기해 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 1719)’와 ‘광무 6년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壬寅 咸寧殿 進宴儀軌 1902)’ 두 의궤를 비교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700년대에 숙종(肅宗)대의 것을 살펴보기로 하였으며, 1902년인 광무 6년과 비교·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대에 따른 기로연의 미수(味數) 상차림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약 100년 이상의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따른 차이 등을 확인하고, 본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궁중의 연회식 중 미수(味數)상차림의 구성과 구체적인 면모를 고찰하여, 궁중연회 상차림의 변화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연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1. 조사 대상 문헌
기해 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는 숙종 45년(1719년)에 망육(望六51세)과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함을 경축하는 의미로 올린 진연(進宴)에 대한 의궤로, 국내에 남아있는 연향에 관한 의궤 중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총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2책 이방(二房)의 찬품(饌品) 부분에서 대전진연에 대전과 황태자궁에게 차린 미수의 내용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壬寅 咸寧殿 進宴儀軌)는 고종이 숙종의 경우처럼 보령 51세(望六)인 광무6년(1902년)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4월에 설행했던 진연(進宴)에 대한 의궤로, 총 3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책 권2의 찬품(饌品) 부분에서 외진연(外進宴)에 대전과 황태자궁에게 차린 미수의 내용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책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2. 연구 조사 방법
본 연구에서는 문헌고찰 및 질적 연구에 활용되는 대표적인 분석방법인 내용분석 방법(contents analysis)을 활용하여 두 의궤의 미수 음식을 살펴보았다(Kassarjian HH 1977; Oh IK 2000; Lee KJ & Cho MS 2008; Park CL 등 2011). 본 연구의 유목 분류는 다음과 같다. 현존하는 연회식의궤 중 기로연(耆老宴) 의궤(Table 1), 1719년과 1902년의 미수상차림 구성(Table 2), 1719년과 1902년의 미수상차림의 음식명(Table 3), 1719년과 1902년의 미수상차림의 음식명 및 재료비교(Table 4)로 분류하였다.
궁중의 연회음식의 실제와 그 가치를 찾고자 하였다. 자료분석에 사용된 문헌인 기해 진연의궤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2019) 홈페이지 원문자료검색을 통하여 원문을 확인하였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Jangseog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9) 홈페이지 고서 자료검색을 통하여 원문을 확인하였다. 두 의궤의 해제 및 서지, 목자, 음식관련 내용 등은 한식진흥원의 한식 아카이브와 국내 서적들과 논문 등을 참고하여 분석하였다.
결과
1. 기로연 관련 의궤와 상차림
역대 군왕 중 기로소에 입소한 왕으로는 태조(太祖), 숙종(肅宗), 영조(英祖)로 알려져 있다(Table 1).
조선의 국왕 가운데 최초로 기로소에 입소한 태조(太祖)의 기로소 입소에 대한 연회식 의궤 기록은 많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권63 숙종(肅宗) 45년 1월 10일 계미 1번째 기사’에 사옹원의 직장(直長)을 역임한 이즙(李楫)이 숙종(肅宗)의 기로소 입소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내용이 나온다(Kim MS 2008). 태조 이성계가 환갑이 되어 자신이 기로소에 들어가 기로연을 거행하는 것이 군부(君父)에 대한 신자(臣子)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때 이즙(李楫)은 기로소의 관례를 언급하며 “3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관례”라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바로 갑술년(1394 태조3)에 60세가 된 태조가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즙(李楫)은 태조대의 고사가 ‘선원보략(璿源寶略)’에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Kim MS 2008).
Park SH(2000)에 따르면, 역대 군왕의 장수는 드문 일이어서 기로소에 입소한 예는 태조(太祖), 숙종(肅宗), 영조(英祖) 및 고종(高宗)이 전부였고, 역대 군왕들은 기로소를 경로지소(敬老之所)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기로소 입소 문제를 신중히 대처하였는데, 특히 숙종(肅宗)은 태조(太祖)가 기로소에 입소한 이후 다른 왕이 입소한 선례가 없는 것과 건강상의 이유로 입소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왕자와 종신들의 끈질긴 설득과 요청으로 입소하였다고 한다.
1719년 1월에 숙종은 기로소에 입소하고 기로연을 베풀것을 결정하였으나, 자신이 눈병을 앓고 있으며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다는 이유로 국왕을 위한 진연은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종신들의 거듭되는 요청으로 거행하는 대신, 참여 인원과 비용을 대폭 축소와 왕비를 위한 내연(內宴)은 거행하지 않는 것, 행사 규모 또한 기존의 관례를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Kim MS 2008).
영조(英祖)는 즉위 20년(1744)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하는데, 숙종의 전례에 따라 59세에 입소하기를 바라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기로소에 들기를 소망하였는데, 이는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정치 행위이자 국가 원로로서 갖는 권위를 함께 누리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Na DS 2014).
광무 6년(1902) 고종의 성수 51세와 재위 40년을 경축하는 의미로 신료들은 기로소에 들 것을 청하였고, 입소는 허락하였으나 연회는 거절하여, 다시 황태자가 진연을 청하여 모든 절차를 간략하고 간소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Cha YR 2015). 대한제국기에 고종은 1901년부터 1902년의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번이나 외연을 갖춘 진연을 거행하였고, 찬품의 수가 많았으며 고임의 높이 또한 높았다. 의례음식의 분량이 2배로 증가하였는데, 이는 음식이 의례 진행 매개체로 시각적 역할을 수행하며, 개항 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고종의 정치적 시도였음을 시사하고 있다(Chung HC 2015b).
미수상차림에 대한 구체적인 면모를 살피기에 앞서, 두 의궤의 상차림에 대한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719년 기해년 진연의궤는 대전진연(大殿進宴)인 외진연(外進宴)은 9월 28일, 중궁전진연(中宮殿進宴)인 내진연(內進宴)은 9월 30일로 정하였으나, 당시 숙종(肅宗)의 건강이 좋지 않아 내연은 취소되었다(KFPI 2019a). 9월 28일 사시(巳時) 즉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경덕궁(敬德宮) 경현당(景賢堂)에서 설행된 대전진연(大殿進宴)인 외진연(外進宴)에 국왕과 세자궁에 올린 상차림은 다음과 같다. 찬안상(饌案床) 1좌(座), 별행과상(別行果床) 1좌(座), 대선(大膳) 3기(器), 소선(小膳) 3기(器)이며, 대전과 세자궁의 상차림은 같은 내용이었다. 기해진연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거듭 사양하다 행하는 행사였던 만큼 규모가 축소되었다(Kim MS 2008). 참여인원 또한 축소되었고, 술잔을 올리는 것도 원래 9작이었지만 7작으로 줄였다(Kim MS 2008). 행사 규모를 축소하는 것과 함께 서늘한 날씨에 병약한 국왕이 하루 종일 바깥에 나와 있을 수 없다는 요인도 고려되었다(Kim MS 2008). 이렇게 술잔을 올릴 때 함께 올리는 상이 찬안상(饌案床)인데, 총 7작 동안 진염수당안(進鹽水唐雁), 진만두(進饅頭) 그리고 5번의 미수(味數) 즉, 5미(味)를 올렸다.
Kim SB(2003)에 의하면 ‘염수당안’의 ‘염(鹽)’은 소금 외에 ‘아름답다’는 의미도 있으며, 염수는 탕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탕이라고 하였다. 잡기 어려운 귀한 산돼지, 노루, 사슴, 기러기, 오리 등을 재료로 만들어, 1작을 올리기 전에 진상되는 귀한 탕에 속하는 음식이다(Kim SB 2003). 재료로는 기러기[唐雁], 참기름[眞油], 간장(艮醬), 후춧가루[胡椒末], 생강(生薑), 잣[實柏子], 계란(鷄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궤 중에는 본 기해 진연의궤에 유일하게 재료와 분량이 기록되어있다(Kim SB 2003). ‘만두(饅頭)’에 사용된 재료를 살펴보면 밀가루[眞末], 소금[鹽], 잣[實柏子], 기주미(起酒米), 생강(生薑), 작본미(作本米), 간장(艮醬), 꿩[生雉], 기화(其火), 어린닭[鷄兒], 돼지앞다리[猪前脚], 송이(松茸), 표고(蔈古)이다.
별행과(別行果)상에 올린 음식은 소약과(小藥果), 홍세한과(紅細漢菓), 백세한과(白細漢菓), 백은정과(白銀正果), 분송화다식(紛松花茶食), 절전복(折全鰒), 건치절(乾雉折), 포도(葡萄), 유자(柚子), 생리(生梨), 수침시자(水沈柿子), 연근정과(蓮根正果)로 총 13기(器)이다. ‘별행과(別行果)’라는 용어는 숙종(肅宗) 이후 대두된 용어로 그 전에는 진다행과(進茶行果), 다례과반(茶禮果盤), 과반(果盤) 등의 주로 차(茶)를 올릴 때 진상된 상차림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예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별행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Kim SB 2003).
소선(小膳)과 대선(大膳)에 올린 음식은 대전과 세자궁 각 3기(器)로 기록되어 있지만, 상차림의 내용은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재료가 사용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Kim SB(2003)에 따르면 소선과 대선은 생체(牲體)를 먹지 않지만 진상하는 ‘의례(儀禮)’의 예법에 맞추어 올려진 음식이라고 하였으며, 1902년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에서는 소선(小膳)과 대선(大膳)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해년 당시 궁중의 찬물을 담당하던 관아로는, 찬안상의 찬물은 내자시(內資寺)가, 별행과상은 사옹원(司饔院)이, 대소선의 찬물은 사축서(司畜署)에서 담당하였다(KFPI 2019a). 내자시(內資寺)는 궐내에 공급하는 쌀, 밀가루, 술, 장, 기름, 꿀, 채소, 과물과 궐내의 연향과 직조 등에 관한 일을 맡는 왕실의 사적 재정기구이다(Han BJ 2005). 사옹원(司饔院)은 궁중에서 이루어지는 왕가의 식생활에 필요한 물선을 수취하여 조리 가공하여 일상의 식사 및 연회음식, 행행식, 제사식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Han BJ 2005). 사축서(司畜署)는 궐내 연향의 희생양을 맡은 아문으로 세조12년(1466)에 분예빈시(分禮賓寺)가 사축서로 이름을 고치고, 사련소는 사축서로 합칭한 것이다(Han BJ 2005).
1902년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는 외진연(外進宴), 내진연(內進宴), 야진연(夜進宴), 회작(會酌), 야연(夜宴)이 설행되었다. 외진연(外進宴)은 황제와 황태자, 종친, 진작대신이 참석하는 남성중심의 연회로 4월 23일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설행되었다. 내진연(內進宴)은 4월 24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황태자 내외와 종친, 척신과 내외 명부 등 주로 황실가족 중심으로 설행되었다. 황제와 황태자 등이 참석하여 각기 술 한 잔씩 마시고 탕을 들고 차를 마신 뒤 끝내는 간단한 연회인 야진연(夜進宴)은 내진연과 같은날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설행되었다. 황태자를 중심으로 명부, 진연청 당상과 낭청이 참여하여 황태자를 위로하는 잔치인 회작(會酌)은 4월 25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설행되었다. 회작의 간단한 뒤풀이로 황태자, 진연청 당상과 낭창만이 참석하는 야연(夜宴)은 회작과 동일의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설행되었다(KFPI 2019b). 본 연구에서는 4월 23일 묘시에 설행된 외진연(外進宴)에 차려진 상차림 중 대전과 황태자에게 올린 미수(味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대전(大殿)에는 대탁찬안(大卓饌案), 찬안(饌案), 별행과(別行果), 미수(味數), 염수(鹽水), 소선(小膳), 대선(大膳), 탕(湯), 만두(饅頭), 차(茶)가, 황태자궁에는 대탁찬안(大卓饌案)을 제외한 동일한 상을 올렸다.
대전(大殿)의 대탁찬안(大卓饌案)의 찬품은 각색메시루편(各色粳甑餠), 각색찰시루편(各色粘甑餠), 각색주악·화전(各色助岳花煎), 각색단자·잡과병(各色團子雜果餠), 만두과(饅頭菓), 연약과(軟藥果), 양면과(兩面果), 황률·청태다식(黃栗靑太茶食), 강분·흑임자다식(薑粉黑荏子茶食), 홍매화연사과(紅梅花軟絲果), 백매화연사과(白梅花軟絲果), 백자연사과(柏子軟絲果), 홍세건반연사과(紅細乾飯軟絲果), 백세건반강정과(白細乾飯强精果), 홍백세건반요화(紅白細乾飯蓼花), 사색입모빙사과(四色笠帽冰絲果), 사색강정(四色强精), 홍매화강정(紅梅花强精), 백매화강정(白梅花强精), 사탕·귤병(砂糖橘餠), 용안(龍眼), 여지(荔枝), 청면(淸麵), 간전유화(肝煎油花), 각색화양적(各色花陽炙) 각 1그릇(器)씩 총 25기(器)이다.
대전(大殿)에 올린 찬안(饌案)상의 찬품은 총 15기(器)로, 방약과(方藥果), 다식과(茶食果), 사색다식(四色茶食), 홍백세한과(紅白細漢果), 홍백차수과(紅白叉手果), 생배(生梨), 대추(大棗), 사색절육(各色截肉), 생선증(生鮮蒸), 생선전유화(生鮮煎油花), 간전유화(羘煎油花), 생게전(生蟹煎), 삼색갑회(三色甲膾), 각색화양적(各色花陽炙), 연계전체수(軟鷄全體燒)를 각 1그릇씩 차렸다. 황태자궁(皇太子宮)에는 각색메시루편(各色粳甑餠), 각색주악·화전·단자병(各色助岳花煎團子餠), 사색입모빙사과(四色笠帽冰絲果), 백세건반강정(白細乾飯强精), 준시(蹲柿), 생율(生栗), 청면(淸麵) 의 7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전(大殿)의 찬안상과 같은 내용이다.
대전진어별행과(大殿進御別行果)에 올린 음식은 약반(藥飯), 면(麵), 오색소연사과(五色小軟絲果), 오색방울강정(五色鈴强精), 사색감사과(四色甘絲果), 각색숙실과(各色熟實果), 각색당(各色糖), 각색정과(各色正果), 준시(蹲柿), 생률(生栗), 실호도(實胡桃), 청면(淸麵), 편육생선전유화(片肉生鮮煎油花), 우설·우낭숙편(牛舌牛囊熟片), 연계증((軟鷄蒸)이다. 황태자궁(皇太子宮)의 별행과(別行果)는 만두과(饅頭果), 삼색매화연사과(三色梅花軟絲果), 오색소연사과(五色小軟絲果), 사색감사과(四色甘絲果)를 제외하고 대전(大殿)과 동일하며, 대전은 15기이고 황태자궁은 17기를 올렸다.
대전진어소선(大殿進御小膳)은 우육숙편(牛肉熟片)과 양육숙편(羊肉熟片)을, 대전진어대선(大殿進御大膳)은 저육숙편(豬肉熟片)과 계육숙편(鷄肉熟片) 2그릇을 올렸으며 황태자궁은 이와 동일하다. 대전에 올린 탕(大殿進湯)은 용봉탕이며, 만두(大殿進饅頭)의 내용도 대전과 황태자궁이 동일하다. 마지막으로 차는 작설차(雀舌茶)로 대전과 황태자궁에 동일하게 올렸다.
이날 차려진 찬품을 경운궁(慶運宮) 서문(西門)인 평성문(平成門)의 안쪽 뜰에 임시로 설치된 전선사(典膳司) 내외숙설소(內外熟設所)에서 마련하였다(KFPI 2019b). 조선시대 말기의 궁내부(宮內府) 관제는 초기와 많이 달라, 전선사(典膳司)는 어선(御膳), 향연(饗宴), 기구(器具) 등을 맡았으며, 내외숙설소(內外熟設所)는 궁중의 연회 때 임시로 가가(假家)를 지어 설치한 주방을 의미한다(Han BJ 2005).
2. 기해 진연의궤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의 미수 상차림
기해 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壬寅 咸寧殿 進宴儀軌)에 등장하는 미수 상의 찬품에 대한 것을 Table 2에 정리하였다.
기해 진연의궤에 등장하는 미수상차림은 대신(大臣)들의 주최로, 1719년 9월 28일 사시(巳時, 09∼11시)에 대전진연(大殿進宴)에서 대전(大殿) 즉 왕과 세자궁(世子宮) 즉 황태자를 대상으로 2가지의 미수상을 올렸으며, 다섯 번에 걸친 5미(味)에 각 미(味)마다 7그릇(器) 혹은 8그릇(器)씩 올렸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의 미수상차림은 황태자(皇太子)의 주최로, 1902년 4월에 총 5회의 연향 동안 6상을 올렸다. 4월 23일 묘시(卯時, 05∼07시)의 외진연(外進宴)에서 대전과 황태자궁을 대상으로 각각 9미(味)에 각 미(味)마다 7그릇(器)씩 올렸다. 그 다음날인 4월 24일 진시(辰時, 07∼09시)에 설행된 내진연(內進宴)에서는 대전(大殿), 황태자궁(皇太子宮), 황태자비궁(皇太子妃宮)을 대상으로 각각 9미(味)에 각 미(味)마다 7그릇(器)씩 올렸다. 같은 날 해시(亥時, 21∼23)의 야진연(夜進宴)에서 미수는 생략되었다. 그다음 4월 25일 진시(辰時, 07∼09시)에 설행된 회작(會酌)의 미수상은 황태자궁(皇太子宮)을 대상으로 하나의 미수(味數)만으로 7그릇(器)을 올렸으며, 같은 날 해시(亥時, 21∼23)의 야연(夜宴)에서 미수는 생략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기해진연의궤의 1719년 9월 28일 사시(巳時, 09∼11시)에 대전진연(大殿進宴)에서 대전 및 세자궁을 대상으로 올린 미수상차림 그리고, 임인함녕전 진연의궤에서 1902년 4월 23일 묘시(卯時, 05∼07시)의 외진연(外進宴)에서 대전과 황태자궁을 대상으로 올린 미수상차림을 살펴보았다.
두 의궤의 대전진연과 외진연에 대전과 황태자를 대상으로 올린 미수상차림의 내용은 Table 3과 같다.
기해 진연의궤의 미수는 총 5가지 상차림으로 다음과 같다. 초미(初味)는 소약과(小藥果), 세면(細麵), 양숙편(䑋熟片), 추복탕(搥卜湯), 병시(餠匙), 석류(石榴), 천엽어음적(千葉於音灸)이다. 이미(二味)는 백미자(白味子), 과제탕(苽制湯), 골만두(骨饅頭), 부어증(鮒魚蒸), 생복어음적(生卜於音灸), 생치전체소(生雉全體燒), 생리(生梨)이다. 삼미(三味)는 전행인과(煎杏仁果), 완자탕(完子湯), 계란어음적(鷄卵於音灸), 어만두(魚饅頭), 생복회(生卜膾), 족편(足片), 홍시자(紅柿子)이다. 사미(四味)는 홍미자(紅味子), 당저장포(唐猪醬泡), 잡탕(雜湯), 생선유아(生鮮煎油兒), 양어음적(羘於音灸), 생복초(生卜炒), 동과만두(冬果饅頭), 포도(葡萄)로 8가지 음식을 올렸는데, 이는 다른 미(味)의 7미 상차림과는 다르다. 오미(五味)는 전은정과(煎銀丁果), 금중탕(禁中湯), 낙지어음적(落蹄於音灸), 생선숙편(生鮮熟片), 저간(猪肝), 피자정과(皮子正果), 유자(柚子)이다. 전체적으로 조과류(造果類)는 유밀과(油蜜果)로만 6회, 실과류(實果類) 5회, 어육류(魚肉類) 중 탕(湯) 5회, 적(炙) 6회, 증(蒸) 3회, 숙(熟) 1회, 적(炙생) 6회, 전(煎) 1회, 숙회(熟膾) 1회, 생회(生膾) 2회, 초(炒)는 1회, 편육(片肉) 1회이며, 면(麵) 1회, 만두(饅頭) 4회이다. 위 음식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보이는데, 매 미(味)마다 조과류(造果類)와 실과류(實果類) 각 1기씩, 어육류(魚肉類)에서는 탕(湯)과 적(炙)이 공통적으로 1기씩 포함되어 있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의 미수는 총 9가지 상차림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미(初味)는 소만두과(小饅頭果), 생률(生栗), 우태율편육(牛胎栗片肉), 천엽전유화(千葉煎油花), 전복초(全鰒炒), 저육전유화(猪肉煎油花), 초계탕(醋鷄湯)이다. 이미(二味)는 홍미자(紅味子), 황률(黃栗), 생합초(生蛤炒), 수란(水卵), 도미전유화(道味煎油花), 해삼전(海蔘煎), 완자탕(完子湯)이다. 삼미(三味)는 백매화강정(白梅花强精), 생리(生梨), 석화전유화(石花煎油花), 생선문주(生鮮紋珠), 생복회(生鰒膾), 부어증(鮒魚蒸), 골탕(骨湯)이다. 사미(四味)는 백자강정(柏子强精), 대조(大棗), 양전유화(羘煎油花), 감화복(甘花富), 생합회(生蛤膾), 해삼증(海蔘蒸), 저포탕(猪胞湯)이다. 오미(五味)는 소다식과(小茶食果), 실호도(實胡桃), 연계전(軟鷄煎), 생복초(生鰒炒), 수어증(秀魚蒸), 어만두(魚饅頭), 양숙탕(羘熟湯)이다. 육미(六味)는 황세건반강정(黃細乾飯强精), 실은행(實銀杏), 난과(卵裹), 육만두(肉饅頭), 홍합증(紅蛤蒸), 생복화양적(生鰒花陽炙), 추복탕(搥鰒湯)이다. 칠미(七味)는 백미자(白味子), 송백자(松柏子), 건낭병(建囊餠), 어채(魚菜), 연계전유화(軟鷄煎油花), 우족초(牛足炒), 저육장방탕(猪肉醬方湯)이다. 팔미(八味)는 홍세건반강정(紅細乾飯强精), 준시(蹲柿), 족병(足餠), 각색채회(各色菜膾), 낙제화양적(絡蹄華陽炙), 연계초(軟鷄炒), 홍어탕(洪魚湯)이다. 구미(九味)는 연행인과(軟杏仁果), 용안여지(龍眼荔枝), 생합전유화(生蛤煎油花), 부화초(腑化炒), 병시(餠匙), 어화양적(魚花陽炙), 칠계탕(七技湯)이다. 전체적으로 조과류(造果類)는 유밀과류(油蜜果類) 6회와 유과류(油果類) 4회로 10회, 실과류(實果類) 9회, 어육류(魚肉類) 중 탕(湯) 9회, 적(炙) 2회, 증(蒸) 4회, 숙(熟) 5회, 적(炙생) 2회, 전(煎) 11회, 숙회(熟膾) 2회, 생회(生膾) 2회, 초(炒) 6회, 편육(片肉) 1회이고, 만두(饅頭) 3회이다. 매 미(味)마다 조과류(造果類)와 실과류(實果類) 각 1기씩, 어육류(魚肉類)에서는 탕(湯)과 전(煎)이 공통적으로 1기씩 포함되어 있다. 또한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미수상차림에는 매 기수마다 상화를 꽂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해 진연의궤(1719)의 미수상차림에는 미수상의 상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3. 미수상차림 음식의 비교
기해 진연의궤(1719)의 조과류(造果類)는 소약과(小藥果), 백미자(白味子), 전행인과(煎杏人果), 홍미자(紅味子), 전은정과(煎銀丁果)로 모두 유밀과류(油蜜果類)이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조과류(造果類)는 유밀과류(油蜜果類)로 소만두과(小饅頭菓), 홍미자(紅味子), 소다식과(小茶食菓), 백미자(白味子), 연행인과(軟杏人果)이고, 유과류(油果類)로 백매화강정(白梅花强精), 백자강정(柏子强精), 황세건반강정(黃細乾飯强精), 홍세건반강정(紅細乾飯强精)이다. 이 중 두 가지 의궤에 서로 공통적으로 유밀과 중 백미자, 홍미자, 행인과이다(Table 4). Kang IH 등(2000)은 미자는 홍미자, 백미자, 홍백미자 등이 있고, 연회식 의궤에 음식명과 그 재료에 대한 기록만 있어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미자’라는 단어가 ‘한과(漢菓)’라는 제목의 유밀과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Lee YG 2001). 그러나 연회식의궤에서는 한 잔치에 미자와 한과가 한상에 차려진 기록이 있기 때문에, 재료는 같지만 모양이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Hwang HS 등 2002). 먼저 백미자의 재료를 살펴보면 두 의궤 모두 밀가루[眞末], 꿀[淸密, 淸], 백당(白糖)이 공통적이고, 기해 진연의궤(1719)는 흑탕(黑湯)이 들어가고 참기름은 없지만,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참기름[眞油]이 들어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백미자는 연회식 의궤에 총 8회(1719, 1828, 1829, 1877, 1892, 1901, 1902년 2회) 등장하는데, 흑탕(黑湯)은 1719년에만 쓰였다(Hwang HS 등 2002). 홍미자를 살펴보면 밀가루(眞末), 꿀(淸密, 淸), 백당(白糖), 참기름(眞油), 지초(芝草)가 공통적인 재료이고, 기해 진연의궤(1719)는 흑탕(黑湯)과 출유(出油)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홍취유(紅取油)가 다르다. Hwang HS 등 (2002)에 의하면 홍미자는 백미자처럼 밀가루에 꿀을 넣고 반죽하여 네모지게 썰어 튀길 때 지초(芝草)를 넣어 붉게 우러난 기름에 튀겨낸 과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홍미자의 홍(紅)색은 지초(芝草)를 이용하여 출유(出油) 혹은 홍취유(紅取油)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1719년 기해 진연의궤의 백미자와 홍미자 모두 흑탕(黑湯)이 쓰였다. Hwang HS 등(2002)은 흑탕(黑湯)이란 식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검은 엿인 흑당(黑糖)을 잘못 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하였다. ‘흑탕(黑湯)’의 내용을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집필하고, 그의 아들이 1795년에 펴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황벽(黃蘗) 열매는 둥글고 검어서 산포도(山葡萄) 같은데, 맛이 매우 쓰므로 꿀을 발라 삼키면 담천(痰喘)이 없어지고, 촉서(薥黍옥수수)로 엿[餳]을 만들어 천초(川椒) 가루 한 숟가락을 타 날마다 몇 차례씩 먹으면 역시 담천이 낫는데, 촉서는 시속에서 말하는 당미(唐米)이고, 엿[餳]은 바로 흑탕(黑湯)이다(Korea Classical Comprehensive DB 2020).”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흑탕(黑湯)’은 검은빛의 엿으로 생각된다. 행인과는 밀가루[眞末], 꿀[淸密, 淸], 참기름[眞油]으로 재료의 내용이 매우 유사한데, 음식 이름이 기해 진연의궤(1719)는 전행인과(煎杏仁果)이고,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연행인과(軟杏人果)로 차이가 있었다. 연행인과(軟杏人果)는 연회식의궤에 총 7회(1719, 1827, 1828, 1829, 1892, 1901, 1902) 등장하는데, 1719년에만 전행인과(煎杏仁果)로 표기하였다고 하였다(Hwang HS 등 2002). 하지만 ‘행인과(杏人果)’라는 이름의 과자가 연회식의궤에 5회(1828, 1829, 1868, 1873, 1901)에 걸쳐 등장하므로, 전행인과가 연행인과일지 아니면 그냥 행인과 일지 명확하지는 않다. 행인과 또한 의궤의 특성상 음식명과 재료만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고조리서에는 등장하지 않아 조리법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만 다른 유밀과 중 ‘연(軟)’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음식중 ‘연약과(軟藥果)’가 있다. 연약과는 연회식의궤에 7회(1827, 1828, 1829, 1892, 1901, 1902년 2회) 기록이 있으며, 「음식디미방(1670)」, 「주방문(1600년대)」, 「요록(1680)」, 「규합총서(1809)」, 「이씨음식법(1800년대 말)」, 「술 만드는 법(1800년대 말)」 등의 고조리서에서 그 조리법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 고조리서 중 「음식디미방」, 「주방문」, 「요록」에 밀가루를 볶으라 하였고, 특히 「주방문」에는 볶은 밀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지지지 말고 즙청하라 하였다(Kang IH 등 2000). 결론적으로 ‘연(軟)’이라는 의미가 붙은 연약과는 밀가루를 볶아 반죽하여 만들어, 참기름을 먹이고 반죽하여 튀겨내는 약과와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연행인과(軟杏人果) 또한 행인과(杏人果)와는 다른 방법으로 만든 과자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기해 진연의궤(1719)의 실과류를 살펴보면 석류(石榴), 생배[生梨], 홍시자(紅柿子), 포도(葡萄), 유자(柚子)이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생률(生栗), 황률(黃栗), 생배[生梨], 대추[大棗], 실호도(實胡桃), 실은행(實銀杏), 송백자(松白子), 준시(蹲柿), 용안여지(龍眼荔枝)이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족의 식생활에 쓰이는 식품들은 공상(供上), 공물(貢物), 진상(進上) 등의 공납제도를 통하여 궁 밖에서 조달하였다(Han BJ 2005). 영조 52년(1776) 「공선정례(貢膳定例)」는 전국 각 도별로 바치는 공물의 물종과 수량, 진상방법이 적혀 있어, 각 지방의 특산물과 산출 시기를 알 수 있다(Han BR 2015). 매달 초하루에 올리는 삭선(朔膳)의 내용이 지방별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기해 진연의궤(1719)의 9월에 각 지역 삭선기록을 살펴보면, 석류는 전라도, 홍시자는 경상도, 포도는 경기도, 유자는 제주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Hwang HS 등 2002). 또 다른 기록으로, 순조 8년(1808)「만기요람(萬機要覽)」의 재용편 공상조는 각전에 올리는 물종 중 식품만 골라 1년간의 수량을 적은 자료이다(Han BR 2015).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식품의 종류, 가격 및 쓰임새가 적혀있어 식생활 풍습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Han BR 2015). 이러한 「만기요람」에 ‘축일공상(逐日供上)’ 이라 하여 대전(大殿)에 날마다 진공하는 품목이 나오는데, 배, 밤, 대추, 호두, 황률, 잣, 곶감 등이다(Hwang HS 등 2002). 음력 4월의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9월에 비하여 다양한 실과보다는 황률, 대추, 호두, 은행, 준시 등 말리는 방법이 가능하여 비교적 보관이 용이하여 매일 진상이 가능한 것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두 의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실과는 생배[生梨]이다.
(1) 탕(湯)
기해 진연의궤(1719)는 추복탕(搥卜湯), 과제탕(苽制湯), 완자탕(完子湯), 잡탕(雜湯), 금중탕(禁中湯)이,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초계탕(醋鷄湯), 완자탕(完子湯), 골탕(骨湯), 저포탕(猪胞湯), 양숙탕(羘熟湯), 추복탕(搥鰒湯), 저육장방탕(猪肉醬方湯), 홍어탕(洪魚湯), 칠계탕(七技湯)이다. 두 의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탕은 추복탕과 완자탕이다(Table 4). 추복탕은 전복을 의미하는 한자를 서로 다르게 사용하였다. 추복탕의 추복은 전복을 말려 두들겨서 넓게 마른 전복이다(Hwang HS 등 2002). 추복탕은 고조리서에 나오지 않아 명확한 조리법은 알 수 없지만, 연회식의궤에 총 9회(1719, 1827, 1828, 1829, 1877, 1892, 1901, 1902년 2회) 차렸으며, 5∼17가지의 재료가 쓰였다(Hwang HS 등 2002). 기해 진연의궤(1719)의 추복탕(搥卜湯)은 추복(搥卜), 잣(實柏子), 어린닭[鷄兒], 소금[鹽]으로 비교적 재료가 간단한데 비해, 임인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추복탕(搥鰒湯) 재료는 추복(搥鰒), 소안심[牛內心肉], 해삼(海蔘), 계란(鷄卵), 전복(全鰒), 표고(蔈古), 무(菁根), 미나리[水芹], 곤자손(昆者巽), 두골(背骨), 참기름[眞油], 밀가루[眞末], 파[生葱], 실백자(實柏子), 후춧가루[胡椒末], 실임자말(實荏子末), 간장(艮醬)으로 증가되었다. 완자탕은 연회식 의궤에 13회(1719, 1765, 1827, 1828, 1829, 1873, 1877, 1887, 1892, 1901년 2회, 1902년 2회) 차렸으며, 13∼24가지의 재료가 쓰였다(Hwang HS 등 2002). 완자탕은 「산림경제(山林經濟1700년대)」, 「규합총서(1809)」, 「술빚는법(1800년대 말)」, 「이씨음식법(1800년대 말)」, 「시의전서是議全書(1800년대 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조선요리제법(1937)」, 「이조궁정요리통고(1957)」 등 고조리서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탕 중의 한 가지이다(Hwang HS 등 2002). 기해 진연의궤(1719)의 완자탕 재료는 대전복(大全卜), 계란(鷄卵), 해삼(海蔘), 잣[實柏子], 홍합(紅蛤), 표고(蔈古), 양(羘), 녹말(菉末), 꿩[生雉], 생강(生薑), 계아(鷄兒), 후춧가루[胡椒末], 생선(生鮮), 간장(艮醬), 우설(牛舌), 참기름[眞油], 돼지앞다리[猪前脚], 식초(醋)이다(Table 4). 비슷한 연대의 「산림경제」의 조리법은 ‘생선살, 소고기, 돼지고기, 꿩고기, 닭고기를 다져 양념하여 완자를 만든다’고 하였다(KTKP 2020a). 또, 「규합총서」의 ‘완탕’은 ‘큰 생선을 껍질과 뼈를 발라내고, 살을 곱게 두드려, 돼지고기나 쇠고기, 생치, 닭고기 중에서 한가지를 곱게 두드려 후추, 생강, 파, 표고를 기름장 합하여 주물러 밤만하게 만든다. 그 가운데에 잣 하나씩 넣어 달걀이나 녹말을 씌워 장국에 간을 맞춰 끓인다’고 하였다(KTKP 2020b). 이로 미루어 기해진연의궤의 완자탕은 꿩, 닭(계아), 생선, 돼지앞다리살 등을 곱게 다져 생강, 후추, 간장, 참기름으로 양념하여 완자를 빚은 후 녹말에 굴려 장국에 간을 맞춰 끓인다. 전복, 해삼, 홍합, 양, 우설을 국건지로 곁들인다. 잣, 표고, 계란(황백지단)을 고명으로 올린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완자탕의 재료는 다음과 같다. 소안심(牛內心肉), 두부[太泡], 참기름[眞油], 밀가루[眞末], 무[菁根], 미나리[水芹], 해삼(海蔘), 전복(全鰒), 표고(蔈古), 곤자손(昆者巽), 두골(頭骨), 양령(羘領), 부화(腑化), 계란(鷄卵), 후춧가루[胡椒末], 실깨가루[實荏子末], 간장(艮醬), 잣[實柏子] 이다(Table 4). 비슷한 연대와 재료로 「조선요리제법」이 있다. 그 내용은 ‘고기는 연한 살코기로 오래오래 이겨서 파 이겨 넣고 후추, 깨소금, 두부를 넣고 잘 섞어서 은행알 만큼씩 둥글게 빚는다. 빚을 때 잣을 1개씩 넣고 빚어놓고 버섯을 깨끗하게 씻어 잘게 썰어서 넣고 맑은 장국을 끓인다. 알고명은 황백미로 얇게 부쳐서 골패 쪽 만큼씩 썰어 놓는다. 맑은 장국의 고기 건더기만 다 건져내고 펄펄 끓을 때에 만들어 놓았던 완자를 달걀을 풀어가지고 묻혀서 끓는 국에 하나씩 넣어서 익힌다. 오래 끓은 후에 그릇에 푸고 알고명을 띄워서 상에 놓는다. 완자는 돈육이나 우육이나 생치나 닭이나 생선이나 뭐든지 절기를 따라 하면 된다.’이다(KTKP 2020c). 이로 미루어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의 완자탕의 조리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소안심을 곱게 다져 으깬 두부와 합하여 양념하여 완자를 만들어 밀가루에 굴리고, 계란물에 묻혀 국에 넣어 끓인다. 무, 해삼, 전복, 표고, 곤자손, 양령, 부화는 삶아 썰어 국건지로 하고, 두골은 전으로, 미나리는 초대로 하여 황백지단, 잣과 함께 고명으로 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2) 만두(饅頭)
기해 진연의궤(1719)의 만두류는 병시(餠匙), 골만두(骨饅頭), 어만두(魚饅頭), 동과만두(冬果饅頭)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만두류는 어만두(魚饅頭)와 병시(餠匙) 두 가지로 기해 진연의궤에 나타난 두 가지 만두와 같은 이름이다. 두 가지 만두의 재료를 비교한 것은 다음과 같다(Table 4). Oh SD & You YJ(2015)에 따르면 병시(餠匙)는 겨울철에 만드는 숟가락 모양과 같은 떡이라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하였는데, 기해 진연의궤는 음력 9월에,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는 음력 4월이었으니 반드시 겨울철에만 만드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기해 진연의궤(1719)의 병시 재료로 육류는 돼지갈비(猪乫非), 꿩[生雉], 어린닭[鷄兒]이며, 그밖에 표고(蔈古), 생강(生薑), 생마늘(生蒜), 송이(松茸), 실백자(實柏子), 계란(鷄卵),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후춧가루(胡椒末), 그리고 밀가루(眞末)이다.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병시 재료로 육류는 소안심(牛內心肉), 돼지고기(猪肉), 묵은닭(陳鷄)이며, 그밖에 생강(生薑), 생파(生葱), 실백자(實柏子),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후춧가루(胡椒末)이다. 병시는 기해진연의궤(1719)부터 임인함녕전진연의궤(1902)까지 총 8회 등장하는데, 그 중 돼지갈비(猪乫非)가 나오는 의궤는 기해진연의궤(己亥進宴儀軌 1719)와 기축진찬의궤(己丑 進饌儀軌 1829) 두 의궤이고, 이때 다른 의궤와 다르게 생마늘(生蒜)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Oh SD & You YJ 2015). 두 의궤에 병시의 공통된 재료는 밀가루(眞末),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후춧가루(胡椒末), 실백자(實柏子) 등 만두피와 양념으로 보여지는 재료 외에 다른 재료에 차이가 있었다. 병시는 고조리서에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한희순 상궁에게 전수 받은 법은 밀가루에 달걀을 섞어 물과 반죽하여 껍질로 하고, 쇠고기, 돼지갈비살, 꿩고기, 숙주, 송이버섯, 표고, 잣 등으로 소를 만들어 넣어 반달 모양으로 빚어 장국에 넣고 끓이는 만두라고 하였다(Hwang HS 등 2002).
어만두는 연회식의궤에 8회(1719, 1828, 1829, 1848, 1892, 1901, 1902년 2회)에 기록되어 있으며, 9∼12가지의 재료가 쓰였다(Hwang HS 등 2002). 기해 진연의궤(1719) 어만두의 재료는 대생선(大生鮮), 생강(生薑), 꿩(生雉), 녹말(菉末), 어린닭(鷄兒), 참기름(眞油), 표고(蔈古), 송이(松茸), 후춧가루(胡椒末)이며,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숭어(秀魚), 계란(鷄卵), 표고(蔈古), 석이(石耳), 목이(木耳), 원추리꽃[黃花], 고추[苦椒], 돼지고기[猪肉], 녹말(菉末), 잣[實柏子], 참기름[眞油], 업지윤(業脂潤), 실깨가루[實荏子末], 생파[生葱], 마늘[蒜], 염(鹽)으로 재료의 가짓수와 종류에 있어 차이를 보였다(Table 4). 어만두의 출처 문헌으로 「산가요록(山家要錄 1450)」, 「산림경제(山林經濟 1700년대)」, 「윤씨음식법(1854)」, 「시의전서(是議全書 1800년대 말)」,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1924)」,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1936)」이다. 「산가요록」의 ‘싱싱한 생선’, 「조선요리제법」의 ‘민어나 도미’, 「시의전서」의 ‘민어, 숭어 또는 도미’ 외에 다른 문헌은 모두 ‘숭어’를 사용했다.
(3) 증(蒸)
기해진연의궤(1719)에 수록된 증(蒸)은 양숙편(䑋熟片), 부어증(鮒魚蒸), 당저장포(唐猪醬泡)이고,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수란(水卵), 생선문주(生鮮紋珠), 감화복(甘花富), 부어증(鮒魚蒸), 해삼증(海蔘蒸), 수어증(秀魚蒸), 홍합증(紅蛤蒸), 건낭병(建囊餠)이다. 감화복(甘花富)은 1892년과 1901년의 연회식 의궤에도 나오는데, 1720년경의 「소문사설(謏聞事設)」에서 유사한 형태의 음식을 찾아볼 수 있다. 「소문사설」을 쓴 이시필은 궁중에서 일하는 숙수나 양반가의 노비에게 배운 음식과 중국을 다녀오며 직접 맛본 음식이나 전해들은 일본 음식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일본의 ‘가마보코’라 부르는 어묵의 일본식 발음을 따서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 표기하였으며, 생선살을 얇게 저민 다음 그 위에 돼지고기, 소고기, 버섯, 해삼, 파, 고추 등을 다져 만든 소를 3∼4켜 올려 둥글게 말아 찐 음식으로, 어선과 비슷하다고 하였다(Han BR 등 2016).
두 의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부어증(鮒魚蒸)이다(Table 4). 부어증은 연회식의궤에 11회(1719, 1827, 1828, 1829, 1848, 1868, 1873, 1892, 1901, 1902년 2회) 차렸으며, 3∼16가지의 재료가 쓰였다(Hwang HS 등 2002). 부어(鮒魚)는 붕어의 한자어로 두 의궤에 모두 붕어가 사용되었다. 그밖에 공통적인 재료로는 계란(鷄卵), 표고(蔈古),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후춧가루(胡椒末)이다. 공통된 재료 외에 기해 진연의궤(1719)에는 계아(鷄兒), 꿩[生雉], 생강(生畺), 밀가루[眞末], 송이(松茸)이고,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숭어(秀魚), 소안심[牛內心肉], 목이(木耳), 원추리꽃[黃花], 곤자손(昆者巽), 부화(腑化), 양령(羘領), 실깨가루[實荏子末]이다(Table 4). Hwang HS 등(2002)에 의하면, 부어증의 조리법은 곰탕거리는 무르게 삶고, 꿩이나 닭, 소안심은 다져 채소와 함께 양념하여 소를 만들어 붕어에 채우고 장국을 붓고 끓이다가 「규합총서」처럼 달걀과 녹말을 풀어 넣어 걸쭉하게 익힌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4) 숙(熟)
기해진연의궤(1719)의 삼미(三味)에 전복숙(全卜熟)이 있으며, 그 재료는 대전복(大全卜), 참기름[眞油], 간장(艮醬), 생강(生薑), 후춧가루[胡椒末], 잣[實柏子]이다. 전복숙이 1800년대 말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좋고 큰 전복을 삶되 처음 삶은 물은 버린다. 쇠고기, 해삼, 문어, 홍합 등을 넣고 무르게 고아 건진다. 전복을 저미거나 열십자로 잘라 다시 잘게 자르고 파와 마늘을 다져서 넣는다. 전복 삶은 물에 후춧가루, 기름, 깨소금, 꿀을 넣고 졸여야 좋으며, 간장을 넣으면 맛이 좋지 않다. 그릇에 푼 다음 잣가루를 많이 넣고 위에도 잣가루를 많이 뿌린다. 쇠고기는 건져내고 문어와 해삼은 잘라 넣되, 홍합은 고는 동안 다 녹는다.’라고 나온다(KTKP 2020d).
(5) 적(炙)
기해 진연의궤(1719)의 적(炙)은 천엽어음적(千葉於音灸), 생복어음적(生卜於音灸), 생치전체소(生雉全體燒), 계란어음적(鷄卵於音灸), 양어음적(羘於音灸), 낙제어음적(落蹄於音灸)이,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생복화양적(生鰒花陽炙), 낙제화양적(絡蹄華陽炙), 어화양적(魚花陽炙)이 기록되어 있다. 기해년에는 어음적으로, 임인년에는 화양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Hwang HS 등(2002)에 의하면 ‘어음적(於音灸)’이라는 말은 「기해진연의궤(1719)」와 「을유수작의궤(1765)」 두 의궤에만 등장하고, ‘화양적(花陽炙)’은 11회(1827, 1828, 1829, 1848, 1868, 1873, 1877, 1887, 1892, 1901년 2회)의 잔치에 차렸다고 하였다. 즉, 어음적은 1700년대 의궤에, 화양적은 그 이후의 의궤에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의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생복을 이용한 적을 살펴보면, 전복의 한자가 기해년에는 大生卜(대전복)으로, 임인년에는 生鰒(생복)으로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공통의 재료는 표고(蔈古), 계란(鷄卵), 참기름(眞油), 간장(艮醬), 후춧가루(胡椒末)이며, 기해년에는 밀가루(眞末)가, 임인년에는 우둔(牛臀), 도라지[桔莄], 파[生葱], 전복(全鰒), 해삼(海蔘), 돼지다리[猪脚], 양(羘), 곤자손(昆者巽), 등골(背骨), 실임자말(實荏子末), 소금[鹽], 녹말(菉末), 잣[實柏子]으로 기해년에 비하여 다소 많은 재료가 쓰였다(Table 4). 생복화양적은 고조리서에 등장하지 않아 구체적인 조리법은 알기가 어려우나, 양, 곤자손, 돼지고기와 해삼과 전복은 무르게 삶아 길게 썰어 양념하여 볶고, 등골은 전으로 부치고, 생전복과 파는 데쳐 양념하고, 우둔, 표고, 도라지는 양념하여 각각 볶아 여러 가지 재료를 합하여 꼬치에 꿴 다음 접시에 담아 잣가루와 황백지단채를 뿌린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Hwang HS 등 2002).
(6) 전(煎)
기해 진연의궤(1719)의 전(煎)은 생선전유아(生鮮煎油兒)이며,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천엽전유화(千葉煎油花), 저육전유화(猪肉煎油花), 도미전유화(道味煎油花), 해삼전(海蔘煎), 석화전유화(石花煎油花), 양전유화(羘煎油花), 연계전(軟鷄煎), 연계전유화(軟鷄煎油花), 생합전유화(生蛤煎油花)이다. 기해년의 생선전유화의 재료는 대생선[大生鮮], 녹말(菉末), 소금[鹽], 참기름[眞油]이며, 임인년의 도미전유화는 도미(道味), 밀가루[眞末], 참기름[眞油], 계란(鷄卵), 소금[鹽]이다(Table 4). 1720년경의 「소문사설」의 ‘굴만두’나 1767년의 「증보산림경제」의 ‘게전(蟹煎)’ 등에서 재료에 녹말을 묻혀 기름에 지진 것으로 나타났다(Choi YJ 2012). 기해년(1719)의 생선전유화도 대생선에 녹말을 묻혀 참기름을 이용하여 지진 것으로 여겨진다. 대조적으로 임인년(1902)의 도미전유화에는 밀가루와 계란이 있다. Choi YJ(2012)에 의하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에 사용되는 재료와 방법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데, 밀가루, 달걀옷을 입힌 후 지지는 전(煎)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7) 회(鱠)
기해 진연의궤(1719)의 숙회(熟鱠)는 생선숙편(生鮮熟片), 생회(生鱠)는 생복회(生卜膾)이며,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의 숙회(熟鱠)는 각색채회(各色菜膾)이고, 생회(生鱠)는 생복회(生鰒膾), 생합회(生蛤膾)이다. 회의 종류 중 생회는 어육생자(魚肉生者)이고, 숙회는 날것을 살짝 데쳐낸 것이다(Hwang HS 등 2002). 두 의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회는 생복회이다. 그 재료를 살펴보면 기해년에는 대전복(大生卜), 소금[醋], 간장(艮醬), 생강(生薑)이고, 임인년에는 생복(生鰒) 200개와 잣[實柏子]이다(Table 4). 생복회는 연회식의궤에 9회(1719, 1829, 1848, 1868, 1877, 1887, 1892, 1901, 1902)에 등장하며, 1719년과 1829년에는 생복 10개, 간장 5홉, 초 3홉, 생강 2홉의 4가지이나, 그 외의 잔치에는 생복과 잣의 2가지만 적혀있다(Hwang HS 등 2002). 1936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 ‘생복회(生鰒膾)’가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복을 껍질에서 떼어 깨끗하게 씻어 닦고 굵게 썰어서 접시에 담는다. 잣가루를 뿌리고 초장에 먹으면 맛이 아주 좋다. 굵게 썰어야 좋다. 전복 속에 들어 있는 푸른 고락도 통으로 가로로 썰어서 전복 옆에 놓고 먹으면 맛이 좋다’(Lee YG 2001).
(8) 초(炒)
기해 진연의궤(1719)의 초(炒)는 생복초(生卜炒),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전복초(全鰒炒), 생합초(生蛤炒), 생복초(生鰒炒), 우족초(牛足炒), 연계초(軟鷄炒), 부화초(腑化炒)이다. 「조선요리제법(1934)」에 “초(炒)는 국물이 건더기의 절반정도 있는 음식”이라고 하였다(Hwang HS 등 2002). 두 의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생복초이다. 전복초(全鰒炒)는 마른 전복을 불려 만들지만, 생복초(生鰒炒)는 생전복으로 만든 점이 다르다고 한다(Hwang HS 등 2002). 생복초(生鰒炒)의 재료는 다음과 같다. 기해년에는 대전복(大生卜), 생강(生薑),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잣[實柏子], 임인년에는 생복[生鰒], 소안심[牛內心肉], 간장(艮醬), 참기름[眞油], 꿀[淸], 잣[實柏子]이다. Hwang HS 등(2002)에 의하면 생복초는 연회식의궤에 7회(1719, 1829, 1873, 1892, 1901, 1902년 2회)의 잔치에 차려졌으며, 생복이 주재료이고, 양념으로 간장, 참기름, 생강의 4가지가 주로 쓰였으나, 1901, 1902년에는 소안심과 꿀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9) 편육(片肉)
기해 진연의궤(1719)의 편육(片肉)은 족편(足片)이,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에는 우태율편육(牛胎栗片肉)이 기록되어 있다. 족편의 주재료는 우족(牛足)이며, 나머지 부재료로는 녹말(菉末), 후춧가루[胡椒末], 대추[大棗], 꿩[生雉], 생강(生薑), 계아(鷄兒), 간장(艮醬), 계핏가루[桂皮末], 초(醋)이다. 우태율편육의 재료는 우태(牛胎), 업지윤(業脂潤)이다. 우태율 편육은 3회(1892, 1901, 1902)의 잔치에 차려졌다(Hwang HS 등 2002). 양지두(陽支頭) 편육은 「계유 진작의궤(1873)」까지 양지두(陽支頭)와 함께 돼지 부위인 저태(猪胎), 저두(猪頭), 저육(猪肉), 저각(猪脚), 저간(猪肝)이 함께 공존하였으며, 「정축 진찬의궤(1877)」 이후의 편육에는 돼지 부위는 사라지고, 소 부위인 양지두(陽支頭), 업지윤(業脂潤), 우태(牛胎)가 편육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Oh SD & You YJ 2015).
두 가지 의궤 중 기해 진연의궤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면(麵)은 세면(細麵)으로 재료를 살펴보면 녹두말(綠豆末), 오미자(五味子), 꿀[白淸], 잣[實柏子]으로 오미자국에 녹말국수를 가늘게 썰어 넣은 창면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조리서에 비슷한 음식이 「음식디미방((閨壼是議方 1670년경)」에 ‘챠면’, 「주방문(1600년대말∼1700년대 초)」의 ‘착면 일명 토장’,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35)」에 ‘창면(暢緬)’, 「동국세시기」에는 ‘화면(花麵)’이라 나온다(Hwang HS 등 2002).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왕이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축하하는 공통의 주제를 지닌 기해 진연의궤(1719)와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1902)에 수록된 미수(味數)상차림의 구체적인 면모를 살펴 궁중 연회음식의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미수(味數)는 주빈에게 술을 올리며 시간전개형으로 등장하는 음식상으로, 헌작수에 따라 여러 상을 마련하기 때문에 실제 시간의 흐름과 다양한 사회 현상에 따라 변화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고, 술의 헌수에 따라 점진적으로 시간축에 의해 배선되는 술안주로, 공간전개형의 대선(大膳), 소선(小膳), 연상(宴床) 등과 함께 연향 음식 문화의 한 유형으로, 올리는 상의 횟수와 음식의 가짓수도 의궤마다 다르다.
1719년 9월 28일 경희궁 경현당 대전진연(大殿進宴)에서 대전과 세자궁이 받은 미수상 기록이 있는 「기해 진연의궤」와, 1902년 4월 23일 함녕전 외진연(咸寧殿 外進宴)에서 대전과 황태자궁이 받은 미수상 기록이 있는 「임인 함녕전 진연의궤」를 비교하여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두 의궤의 미수상의 개수에 차이를 보였다. 기해년(1719)에는 오미(五味)이고, 임인년(1902)에는 구미(九味)까지 차렸다. 이는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기해년(1719)에는 백성들의 기근과 숙종(肅宗)의 건강상의 이유로 거듭 사양하다 행하는 것으로, 진연 자체가 축소됨으로써 헌작수도 줄고 더불어 미수상의 규모도 축소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02년의 음식상이 극대화 된 것은 대한제국기 황제국으로 전환으로 인한 의례음식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두 의궤의 미수상차림 개수의 차이는 왕과 황제의 격식에 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Kyuong SJ & Cho JM(2013)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법전에 명시된 설행 기준을 대체로 준수하는 편이었으나, 조선후기로 가면서 진연류의 잔치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즉, 이전에는 규모와 절차 면에서 가장 성대한 정일연향(正日宴享) 하나 만을 설행하였다면, 순조 28년(1828)의 무자진작(戊子進爵)부터는 같은 공간에서 야연(夜宴)과 익일회작(翌日會酌)을 연속적으로 베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Kyuong SJ & Cho JM 2013). 이러한 이유로 기해년(1719)에 비하여 임인년(1902) 잔치의 규모 및 상차림이 축소되었다고 보여진다.
각 미수마다 차려진 찬품의 개수가 상이하다. 임인년(1902)에는 매우 규칙적인 형태로 매 미(味)마다 7기(器)씩 차린 것으로 확인되는데 비해, 기해년(1719)의 미수는 초미(初味), 이미(二味), 오미(五味)는 7기(器)씩 올렸고, 삼미(三味)와 사미(四味)에서는 8기씩 올린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임인년(1902)의 미수상에는 비단이나 종이로 만든 상화(床花)를 매미 각 7개씩 사용한 반면, 기해년(1719)의 미수상에는 상화가 확인되지 않는다. 미수상차림에 있어서 상화 사용의 유무를 후속 연구를 통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음력 9월에 행하였던 기해년 진연의궤(1719)와 음력 4월에 거행한 임인년 함녕전 진연의궤(1902)는 식재료에 있어 계절적인 차이를 보였다. 특히 실과류에 있어 더욱 뚜렷한데, 기해년에는 석류, 생배, 홍시자, 포도, 유자 등 다양한 실과가 올려진 반면, 임인년에는 생률, 황률, 생배, 대추, 실호도, 실은행, 송백자, 준시, 용안여지 등 말리거나 저장이 가능한 실과를 올렸다. 특히 기해년에는 송이가 재료에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같은 어만두임에도 불구하고 기해년에는 송이가 쓰였지만, 임인년(1902)에는 쓰이지 않았다. 그밖에도 기해년(1719)에 송이가 쓰인 음식으로는 당저장포, 잡탕, 동과만두, 어만두, 부어증 등으로 파악되었다.
두 의궤의 미수상차림에 전체적으로 많이 사용된 재료는 전복인데, 전복의 한자표기가 기해년(1719)에는 전복(全卜)으로, 임인년(1902)에는 전복(全鰒)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전복은 생복(生卜, 生鰒)에서 추복(搥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것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홍시자(紅柿子)나 준시(蹲柿) 같이 감의 다양한 가공형태를 엿볼 수 있었다.
두 의궤에서 같은 이름의 음식이더라도 재료의 구성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약 100년 이상의 시대차이와 잔치가 열린 계절에 따른 차이 등을 볼 수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왕조 궁중의 연회음식 중 미수상의 구체적인 구성과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조선왕조 음식문화의 시대적인 변천 과정 연구의 기초 자료로 기여하고자 한다. 덧붙여, 다른 년도의 연회식의궤 미수상차림과의 비교 등을 후속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요구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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