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세태소설에 나타난 경성부민(京城府民)의 식생활 문화 연구 : 염상섭의「삼대」,「무화과」와 박태원의「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
Abstract
The 1930s Japanese colonial period, with regards to food culture, was a period of traditional Korean food combined with Japanese and Western cuisine. The history of Korea underwent very radical changes during this period. The lifestyle of Gyeongseong citizens was described in novels on manners written by contemporary authors. This study attempted to elucidate the dietary culture of Gyeongseong citizens, a then already international city transforming from a traditional town into a modern city, and how it was changing and described in novels on manners based on actual places and events. Among past novels on manners, Yeom Sang-sup's「Samdae」 and its sequel「Muwhagwa」, as well as Park Tae-won's novels「Cheonbyeonpunggyeong」 and「Soseolga Gubossi-ui 1 il」 are works that are representative of understanding dietary culture. In the 1930s, there were fine Western restaurants and Japanese restaurants on the south side of Cheonggyecheon in Gyeongseong, as well as Korean bistros and Korean restaurants on the north side of Cheonggyecheon. The space for special food consumption was at a temple located on the outskirts of Gyeongseong, which provided food and lodging. In addition, food delivery became common. Many kinds of food could be delivered, including Korean, Chinese, Western, Japanese and Korean banquet tables (Gyojasang). This study aimed to provide basic data that show how Korean traditional foods coexist with food from other cultures, and how it can develop as part of the diverse food culture in the future.
Keywords:
dietary culture, Korean food culture, novel of manners, Japanese colonial period서 론
우리는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는 국제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음식의 세계화, 대중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현재 한국에는 전통 한식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의 음식과 식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변화를 겪은 시기인 일제강점기 중 1930년대는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 문화와 일본 및 서구의 식생활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여, 현재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Joo YH 2013). 1930년대 식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구한말 이후 일본을 통해 유입된 새로운 음식문화가 일상생활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서구식 영양 이론이 소개되고, 중국, 일본, 서양의 각종 요리가 유입되면서 조선음식이 서양 그릇에 담기는 등 한국 음식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Joo YH 2011). 1910년 한일강제병합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일제강점기는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 정치적 책략 속에서 타의에 의해 급변한 시기이며,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근대적인 식문화가 뿌리내리는 중요한 시기였다(Lee KJ & Cho MS 2008). 또한, 서구 문물이 일본을 통해 도입되면서 기존의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 아래서 형성된 문화와 접목되거나 혹은 불가피하게 충돌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였다(Kim MH & Chung HK 2011). 일제 강점기 중에서도 1930년대는 외적으로는 문화적 융성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경성의 인구는 1910년대의 10년 동안은 거의 변함없이 25만 명을 유지하였으나, 1930년에 35만 명, 1935년에는 40만 명으로 폭발적 증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 재조일 본인의 수는 조선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했지만, 경성부 인구구성은 일본인이 15∼25% 정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특수했다(Yeom BK 2005).
한일 양국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고대부터 문화의 혼융현상이 발생했는데, 식문화 또한 서로의 문화가 가깝게 유착되면서 동화되거나 혹은 문화적 변용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다(Choi IH 2010). 1930년대 경성은 구한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문화적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음식문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우후준순 일본음식점과 선술집이 생겨났고, 그 영향은 점차 대중에게 확대되었다. 당시의 문화혁명과도 같았던 식문화의 생동감 넘치는 현장은 요리책보다는 소설, 산문, 르포르타주가 실린 신문, 잡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Lee S 2017). 그중 1930년대를 배경으로 당대에 집필된 세태소설은 대중잡지, 신문 등에 연재되었으며, 사실적 묘사에 치중되어 있어 그 시기 경성 거주 사람들의 음식문화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후대에 창작된 소설들(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아리랑」, 권비영의「덕혜옹주」 등)과는 달리, 1930년대 작가들이 당대를 배경으로 쓴 세태소설의 경우, 인물과 서사구조 등만 허구로 가져올 뿐, 생활묘사는 실제에 근거했기 때문에 인물들의 살아있는 심리묘사와 행동 등을 음식문화와 연관해서 훨씬 더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세태소설이란 실재적 현실을 배경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시대를 그리는 새로운 양식의 장편소설이다. 세태소설에는 계층별 혹은 유형별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다양한 그룹의 대표자로서 제각기 삶의 양식을 대변하여 당대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Park YS 1992).
본 연구에서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창작된 염상섭의 소설「삼대」와 그 속편인「무화과」, 박태원의 장편소설「천변풍경」과 중편「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분석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에 강제적으로 이식된 일본문화와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문화가 우리의 전통문화와 뒤섞이면서 경성 사람들의 식생활문화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한국의 전통음식이 다양한 음식문화와 어떻게 공존하게 되었는가를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연구 방법
1. 연구 대상
염상섭 소설「삼대」와 그 속편인「무화과」는 1931년 1월부터 1932년 11월까지 거의 2년 동안 지면을 달리하여 각각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이다. 본 연구에서는 ㈜새움출판사의「삼대」(초판 3쇄, 2017년 6월 15일 발행)와 두산동아의「무화과」(초판 3쇄, 1997년 8월 1일 발행)를 분석하였다. 박태원의「천변풍경」은 1936년 8월부터 10월까지 출간된 조광 2권 2호부터 10호에 연재되었고,「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1934년 8월에서 9월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소설이다. 본 연구에서는 ㈜문학사상의「천변풍경」(초판 2쇄, 2013년 6월 17일 발행)과 문학과지성사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초판 15쇄, 2011년 8월 12일 발행)을 분석하였다.
2. 이론적 배경
1930년대에 집필된 세태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소설이 집필되는 바로 그 시대이며, 소설의 스토리텔링도 실제에서 가져와 세밀하게 묘사할 정도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사회상과 생활상을 연구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세태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36년에 발표된 두 편의 상이한 소설, 박태원의「천변풍경」과 이상의「날개」를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분석한 최재서의 ‘리아리즘의 확대와 심화-「천변풍경」과「날개」에 관하야’(조선일보 1936. 10. 31∼11. 7)라는 글에서이며, 세태소설에 대한 논의는 임화의「세태소설론」,「문학의 논리」 등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Park BS 1995). 우리는 1930년대의 생활상을 그 당대를 살고 있던 작가가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묘사한 세태소설을 통해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집필된 대표적인 세태소설로는 박태원의「천변풍경」,「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채만식의「탁류」,「태평천하」, 김남천의「대하」를 비롯해서 염상섭의「삼대」,「무화과」 등을 들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1930년대에 집필된 세태소설 중에서도 군산 등 전라도 일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탁류」나 개화기의 평안도 관서지역을 배경으로 한 김남천의「대하」를 제외하고, 1930년대 초의 경성을 배경으로 창작된 염상섭의 소설「삼대」와 그 속편인「무화과」, 1930년대 중반의 경성을 배경으로 창작된 박태원의「천변풍경」과「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분석하였다.
염상섭은「삼대」에서 ‘밥 한 끼에 정조도 파는데, 거지사회에서는 오전, 십전에도’라고 궁핍한 사회를 증언하고 있다. 1930년대는 신문소설의 전성시대였다. 5개의 일간지에는 각 신문 당 두 세편의 소설이 연재되었고, 독자들은 소설을 읽기 위해 신문을 구독할 정도로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 소설의 상당수가 세태소설이었다.
염상섭(1897. 8. 30.∼1963. 3. 14.)의 많은 작품은 시간적으로는 그가 살던 그 시대, 공간적으로는 그가 대부분의 삶을 거주했던 경성(해방 후 서울)을 배경으로 집필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다른 작가와는 달리 그는 단 한 편도 역사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충실한 작가라는 반증이다. 그의 소설 중에서 특히 1931년 발표된 장편「삼대」(조선일보, 1931. 1. 1.∼9. 7)와 「삼대」의 속편으로 집필된 「무화과」(매일신보, 1931. 11. 13∼1932. 11. 12)는 현실과 밀착된 구체적 묘사와 생동감 있는 언어를 동원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써 뛰어난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는 세태소설의 대표작이다. 염상섭의 소설은 비록 소설적 허구의 틀을 갖고 있으나, 의식주와 같은 삶의 기본 요건에 대한 충실한 묘사를 하고 있다. 당대 재력가가 사망했을 경우 재산분배가 어떻게 되는지를 첩과 아들, 며느리 등 각 자손별로 세밀히 상속 내역이 적혀 있고, 상을 당했을 경우 어떤 절차를 거쳐 발인되는지 묘사도 되어 있어서 1930년대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일종의 풍속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박태원(1909. 12. 7.∼1986. 7. 10)은1936년「조광」지에 「천변풍경」을 연재했고, 1938년 장편「천변풍경」과 단편소설집「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간했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에서 볼 수 있는 박태원의 초기 작품 세계는 일상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적 존재의 심적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박태원은 주로 경성부 서민들의 삶과 행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휩쓸려 가는 인물들을 묘사하여 소설을 통해 1930년대 도시생활의 면모를 알 수 있다(Kwon YM 2009).「천변풍경」은 일제강점기 경성의 중심을 가로지르던 청계천 주변의 이발소, 안경점, 카페, 한 약방, 포목전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제1절 청계천 빨래터부터 제50절 천변풍경까지 총 50절로 구분되어 있다.
(1) 시간적 배경
「삼대」는 염상섭의 소설들 대부분 그렇듯이 현재적 시간에 충실해서, 1920년대 후반부터 소설이 집필되던 당시인 1930년대 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31년 1월 1일부터 신문에 연재된「삼대」는 겨울을 배경으로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지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즉, 소설이 연재되어 독자들이 읽는 그 순간의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해 소설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을 거의 일치시킨 것이다. 장편소설「삼대」는 졸부 조의관과 교회 장로인 조의관의 아들 조상훈, 그리고 조상훈의 아들 조덕기 등 조씨 3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봉건적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돈을 최우선시하는 조의관, 미국 유학을 통해 신문물을 접했지만 주체성을 잃고 타락한 조상훈,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조덕기 등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몰락해가는 삼대의 삶을 통해 1930년대 초 경성 재산가 집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삼대」에 등장하는 제 2차 공산당 사건 탄압에 관한 대화를 보면 당대 대중들의 삶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창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 「무화과」도 첫 회에 만주사변을 언급하면서 허구적 창작인 소설과 실재적 현실의 일치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만주 봉천 북쪽 유조구의 선로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되면서, 이것을 중국군의 소행이라며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만주를 침공한 사건이다. 「무화과」는 소설 연재 2개월 전 일어난 만주사변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박태원의「천변풍경」과「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1930년대 중반의 경성 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장편「천변풍경」은 1년 사계절 변화하는 청계천 풍경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경성에 사는 26세 소설가 구보씨가 어느날 정오쯤 집을 나서서, 새벽 두시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경성 시내를 배회하며 하루 동안 겪은 일을 그리고 있다.
(2) 공간적 배경
「삼대」와「무화과」 모두 경성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카메라로 샅샅이 경성을 훑듯 염상섭의 문체는 1930년대 초의 경성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의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포함시켜 지위를 낮추었다. 해방 전까지 일제는 크게 몇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였는데, 1914년에는 경성부 내부의 각 지역을 정(町)으로 개칭했다. 일제는 끊임없이 도성의 성벽이나 궁궐의 담을 허물고, 그곳을 관통하는 도로나 전차 등 철로를 만들어 조선의 전통적 공간을 해체하며 주체성을 말살시키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것이 창경궁과 종묘 사이로 전차가 다니게 한 종묘관통선인 제6호선 공사를 들 수 있다(Yeom BK 2016). 1930년대 경성부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Noh JS 2014). 염상섭의 소설「삼대」와「무화과」에 나타난 공간을 음식문화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의 종로 근처에는 조선요릿집 등이, 청계천 남쪽의 충무로, 명동 등 남대문 근처에는 일본식 국숫집인 소바 집이나 일본 요릿집이, 그리고 그 중간 부분에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청요릿집이 위치해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지속될수록, 즉 1930년대 후반부로 갈수록 일본식 요릿집이나 국숫집이 청계천 북쪽으로 진출하고, 청요릿집 역시 경성부 전역으로 세력을 확산하며, 요릿집들은 더욱 늘어났다. 1936년 12월 4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당시 카페, 바, 음식점 수는 2,564곳이고, 149,000명의 손님들이 그곳을 이용했다. 또 경성 시내와 교외로 범위를 한정하면 약 50개의 요릿집(요정, 요리옥)이 있었다(Kim DS 2017). 박태원 소설은 그가 거주하던 종로와 청계천변, 청진동, 관철동과 그 이웃 동네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박태원은「낙조」,「골목 안」,「천변풍경」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다양한 각도에서 1930년대 서울 한복판에 살던 서울 사람들의 운명을 소설화했다(Cheon JH 2011). 경성 시내 청계천변의 모습은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청계천 주변이라고 해도 남쪽과 북쪽에 있는 가게의 풍경이 다르다. 북쪽에는 이발소, 한약방 등이 있고, 일본인이 많이 사는 남쪽에는 고급 포목전이나 카페 ‘평화’가 있다.
결과 및 고찰
1. 1930년대 식문화 실태
조선인 3명이 모이면 그 중 한 명은 빚쟁이거나 병자 또는 감옥에서 출소한 사람이고, 때로는 3명 다 그럴 경우가 있다고 언급한 「삼천리」의 권두언은 1930년대 초 조선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Kwon DE 1931). 염상섭의「삼대」와「무화과」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며칠 혹은 한 달 이상 유치장에 있다가 풀려났다. 이렇게 병든 사회에서 소설 속 여성들은 자신의 지위,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소설 속에서 밥 짓고 식사 준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일이었다.「무화과」에는, 보통학교만 나온 이원영의 부인이 남편의 첩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상을 내면서 부모를 원망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삼대」에서 조덕기의 편지 내용을 보아도 염상섭은 시대가 변해도 여성이 밥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전통적 역할은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시중이나 들라고 공부는 부리만 따게 하고 음식 솜씨를 가르쳤던가 생각하면 또 화가 난다. (중략) 이 세상 여자가 모두 공부를 하고 나면, 누가 밥을 짓고 옷을 꿰메고 아이를 기르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Yum SS 1997,「무화과」p387).’
‘여자는 밥만 짓고 아이만 기르라는 거냐고 흔히 말하데 마는 세상에는 밥 짓고 아이 기를 손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하나(Yum SS 2017,「삼대」p 310).’
「삼대」나「무화과」 모두 경성 중상류층 집안의 주인공들은 독립운동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일제에 고초를 겪으며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 과정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존을 이어가는 최소의 행위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밥을 하는 주체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에 오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어로「조선의 습속」이라는 책을 1926년부터 매년 개정판으로 발간했다. 이 책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 절대로 식은 밥을 먹지 않았다. 식사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먹고, 식후에는 차를 마시지 않으며 밥을 짓고 난 솥에 물을 붓고 데운 물을 마신다’라고 나와 있다. 조선에서는 아침밥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반찬 수도 아침이 가장 많았다. 세태소설 속에는 ‘조반을 먹고’ 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일상에서 조반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컸다. 식사는 대부분 혼자 상에 앉아 먹는 독(외)상 차림인데, 이것은 조선 중기 확립되었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서서히 사라져 1920년대부터 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먹는 형태(두리반)로 바뀌었다(Han BJ 2001).「삼대」의 중심인물인 조씨 일가는 집에서 하인들이 차려 주는 밥을 주로 혼자서 먹었다. 그러나 가끔 친구들이 찾아올 때나 부부, 혹은 이와 비슷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겸상을 하기도 했다. 남자들끼리 식사를 하고 나면 여자들이 상을 차려 먹었다. 전통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삼대」,「무화과」 등 소설 속 장면들에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한 상에서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내연관계라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병화는 주인과 겸상을 해 밥을 먹는 것이었다. 마누라는 안방을 아니 치웠다고 사내들의 밥상은 건넌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Yum SS 2017,「삼대」p 247).’
‘별안간 잔칫집이 된 듯이 법석을 하고 뒤웅신을 신고 열시나 돼서, 겨우 교자상 하나가 아랫방에 들어갔다. 외상 하나 겸상 하나를 들여보내려니까 시누이가 내려와서 큰상 하나에다가 그대로 보아도 좋다니까 그렇게 만든 것이다. (중략) 게다가 남녀와 한상에 셋 겸상으로 밥을 먹을 때야 묻지 않아도 알조라고 안방에 들어앉아 혼자 앓는다(Yum SS 1997, 「무화과」p 388).’
조선총독부가 발간한「조선의 습속」에도 방 안에서 남녀는 함께 식사하지 않으며, 남성들은 따뜻한 아랫목, 여성들은 차가운 윗목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한 가족일지라도 남자는 여자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여자도 남자의 공간을 엿보거나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성의 인구는 1910년대의 25만 명에서 1930년에 35만 명, 1935년에는 40만 명으로 폭발적 증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 기간 동안 재조일본인의 수는 조선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했지만, 경성부 인구구성은 특수했다. 경성부 전체 인구의 15∼25%를 일본인이 차지할 정도로 경성부에는 일본인들이 밀집해서 거주하고 있었다(Yeom BK 2005). 1931년 조선총독부가 기록한 경성의 인구분포 현황은 Table 1과 같다. 일본인의 인구가 100,323명으로 경성부 인구 365,432명의 27%를 상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부 거주 일본인들은 대부분 상류층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식생활에서도 전통적인 한식 문화와 다른 소비행태를 보였다. 일본인들의 식생활 문화는 경성부민의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전반적인 변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이런 양상은 당시 집필된 세태소설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염상섭의「삼대」,「무화과」의 중심인물이 최상위 생활을 영위하던 경성 재력가와 신문사 영업국장 등 상류층이라면, 박태원의「천변풍경」에는 청계천 주변의 서민들, 이발소 직원, 한약방 조수, 카페 여급, 시골에서 상경한 셋방 가족 등 하층계급이 많이 등장했다. 박태원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그 중간에 있는 지식인 소설가 등 중산층 생활을 보여주었다. 세태소설 속 경성부민의 계층 별 식생활은 Table 2와 같다.
염상섭의 소설에서 지주, 언론인, 유학생들이 요릿집과 호텔 식당, 교외의 유흥 공간인 절에서 풍성하게 음식을 소비했다면, 박태원의 소설에서는 청계천 주변 서민들의 팍팍한 삶이 묻어난 음식이 등장하였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평범한 서민들이 먹는 음식들은 밥과 콩나물국, 배추김치, 오이지, 콩자반 등에 불과했다. 천변 사람들은 빨래터에 모여 묵은 통김치나마 넉넉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국수가 들어있는 장국은 가장 보편적인 음식이었으며,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으로는 떡국과 국수가 자주 등장했다. 서민층의 외식 메뉴인 설렁탕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었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의 가격은 약 10전으로 냉면이나 장국밥이 15전 하던 것에 비해 아주 저렴했었다. 달걀 하나 값이 4전이었으므로 설렁탕 한 그릇이 달걀 3개 값이 안 되었던 것이다(Yeom SS 2017). 또한, 서민들은 결혼식 날에나 요릿상을 마주 할 수 있었다.「천변풍경」에서 결혼식이 되어야 겨우 장국 한 그릇 얻어먹는 동네 사람들의 형편과 딸 시집보내기 위해 다방골 요릿집에서 오 원을 주고 차려온 큰 상이 결혼식 음식의 전부인 청계천변 서민들의 궁핍한 삶이 드러나 있다. 그 시절 용산의 공장에 다니던「삼대」의 필순이나 철공장에 다니는「무화과」의 완식이, 전매국 공장 여직공들처럼, 직장인들은 ‘벤또’를 싸가지고 다녔다. 당시 진고개 등에 있던 일본식 제과점에서는 센베이, 모찌떡 등 일본과자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부 고급과자들은 한 상자에 오 원인데, 최고급 요릿집인 ‘명월관’의 1인 식사 요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명치옥’이라는 일본 과자 집에서 파는 과자들은 그 만큼 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반면 서민들의 주전부리 중 하나는 계피였다.「천변풍경」의 이발소에서 일하는 소년 재봉은 한약국 조수로 일하는 친구에게 계피를 얻어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삼대」와 「무화과」를 보면 배달문화 및 테이크아웃 음식문화가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경성은 도시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외식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집에서 집밥을 먹기도 했지만, 밖에서 중식(청요릿집), 일식(일본식 요릿집), 양식(호텔 식당 등), 한식(요릿집, 장국밥집)을 사 먹었다. 또, 가정에서 식당으로 주문을 하면, 요릿집에서는 교자상으로 배달을 했고, 청요리, 국수, 설렁탕 등 음식은 물론 반찬, 식재료까지 배달이 되었다. 세태소설 속 경성부민의 상황에 따른 배달음식 종류는 Table 3과 같다.
배달 주문은 당시 중류층 집안에 퍼지기 시작한 전화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고, 가게에 들러 구두로 주문을 하면 배달원이 집까지 배달해주는 시스템도 자리 잡고 있었다. 배달처가 가깝거나, 배달 물건의 무게가 적게 나가면 가게 점원이나 주인이 직접 걸어서 배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배달 운송수단은 자전거였다. 식당에 그릇을 들고 가서 원하는 음식을 직접 테이크아웃해서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삼대」나「무화과」에 나온 물가에 의하면, 달걀 하나에 4전, 대중적 담배인 피죤 한 값이나 설렁탕 한 그릇 값은 불과 10전이었다. 당시 화폐 15,000원은 설렁탕 15만 그릇, 담배 15만 갑의 값에 해당된다.
염상섭, 박태원이 쓴 세태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음식을 수시로 주문해서 먹었다. 배달로 주문하는 음식은 일식, 중식, 한식 등 다양했다. 가정집이나 사무실에서 주문하는 음식들은 주로 소바와 청요리, 그리고 설렁탕이나 장국이었다. 요릿집에 전화를 하면 교자상으로 차려서 한 상 차림 전체가 통째로 배달되었다. 심지어 서양식당에도 주문을 하면 런치가 집까지 배달되었다. 값싼 장국도 배달이 가능하였다.「무화과」에서 등장인물이 일본국수를 배달 시켜 먹으려다가 장국을 사가지고 오자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무화과」의 소설 전개에 있어 당시의 평범한 일상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1930년대 초 경성의 중산층 사람들이 어떻게 식사를 했을까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떡국을 쑤어 먹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식사 방법 중의 하나라면, 배달 음식으로는 일본 국수 혹은 장국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민들의 배달음식을 정확하게 묘사한 부분은「천변풍경」 제10절 ‘사월팔일’에 나와 있다. 서민들이 배달해 먹었던 비교적 값싼 음식들은 냉면, 장국밥, 대구탕, 만두, 비빔밥 등이었다.
2. 1930년대 식공간과 음식
일제강점기 세태소설에 등장하는 식공간은 대부분 경성부 내 실존했던 장소이다. 양식당, 요릿집, 제과점, 중식당, 카페 등 등장인물들이 드나드는 공간은 1930년대 경성 중심부에서 실제로 영업했던 유명한 외식 장소였다. 경성부 내 실존했던 식공간은 Table 4와 같다.
(1) 요릿집
일제강점기 35년동안 조선은 모든 것이 궁핍했다. 그래도 경성은 가장 식생활 수준이 높은 근대화 된 도시였으며, 사람들은 집밥을 먹는 것 이외에도 외식을 많이 하였다. 외식에서 최고급 식공간은 요릿집이었다. 세태소설에 등장하는 한식의 종류와 식공간은 Table 5와 같다.
‘명월관’, ‘태화관’, ‘식도원’ 등 한식 요릿집의 중심은 술과 안주였다. 식사는 술과 안주가 나오고 유흥이 이어진 뒤 맨 마지막에 나왔으며, 간단한 후식이 제공되었다(Joo YH 2013). 근대식 고급 요릿집이 등장한 것은 1903년이었다. 현재 광화문 동아일보사 자리인 황토현 네거리에 있던 ‘명월관’을 최초의 요릿집으로 꼽을 수 있는데, 2층 규모의 목조 건물이었던 ‘명월관’은 구한말 궁내부 주임관으로 궁중요리를 하던 대령숙수 안순환이 운영하였다. 1909년 관기가 해체되자, 갈 곳 없는 기생들이 대거 ‘명월관’으로 몰려왔다. ‘명월관’에서는 조선 궁중의 음식과 비슷한 음식들이 준비되었다.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명월관’에 장춘원이라는 그윽한 특실이 있었고, 2층의 커다란 홀에서 다양한 피로연을 개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Seo ES 등 1973). ‘명월관’은 191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사동 순화궁에 있던 ‘태화관’도 ‘명월관 별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했지만, ‘태화관’은 1919년 3․1 독립선언문이 낭독되면서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고 주인 안순환은 다시 청계천 입구(옛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식도원’이라는 요릿집을 열었다. 1931년 연재된「무화과」 첫 부분부터 등장하는 ‘명월관’은, 안순환 씨에게서 간판을 넘겨받은 이종구 씨가 현재의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서 영업했던 돈의동의 ‘명월관’이다. 요릿집의 주요 손님은 궁중 대신들과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었으며, 그들은 주로 신선로를 먹었다. 신선로는 요릿집의 대표적인 메뉴로 자리를 잡았고,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적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었다(Kim DS 2017). 요릿집의 가격은 상차림에 따라 달랐는데, ‘명월관’의 경우, 가장 싼 상이 일인당 3원, 가장 비싼 상이 일인당 7원이었다. 즉, 1930년대 초에는 가장 값비싼 음식점이 ‘명월관’과 같은 한식 요릿집, 백화점과 호텔의 양식당이다. ‘명월관’ 같은 고급 요릿집은 최고의 사교장이었으며, 은밀한 접대의 장소이기도 했다. 고급 요릿집 출입은 1910년대만 해도 왕족이나 고관대작, 재경성 일본인 등 특수계층 전담이었지만 1930년대에 오면서 대중화, 일반화되었다.
(2) 장국밥집, 선술집
장국밥은 일반 서민들의 대표 음식이었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보면 구보씨가 벗과 저녁을 먹으러 음식점 ‘대창옥’에 가서 설렁탕을 주문하는 장면이 있다. 설렁탕은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초기에는 양반 계층을 비롯한 상류층은 설렁탕을 외면했지만, 점차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으며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식당문화가 형성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Kim DS 2017). 1930년대 중반에 가면 설렁탕을 고급 음식점에서도 판매했고, 신분에 관계없이 널리 먹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의 가부장적 관습 아래서 남자들은 독상을 받고 식사를 했었지만, 대중식당이 출현하고 그곳에서 지체 높은 사람들도 여러 계층과 어울려 식사를 하면서 함께 어울려 밥을 먹는 문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3) 가정
1930년대 초 경성 시민들의 주식은 현재와 같이 밥이었다. 사람들은 부엌에서 장작을 넣은 화로를 이용해서 밥을 지었다. 국과 반찬은 전통적으로 집에서 직접 담근 장으로 국을 만들거나 채소를 길러 먹기도 했지만,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반찬가게들이 성업을 했다.「삼대」에는 일본식 반찬가게 개개의 물건 값과 반찬가게에 진열된 식품 종류들, 파 한 단, 치리멘자코(멸치) 한 근, 달걀 세 개, 팥 다섯 곱 등 사고 파는 물건들이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이는 가정에서 자급자족으로 만들어 먹던 식생활 문화에서 반찬 상점에서 구입하는 양상으로 변화되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외식은 여전히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배달문화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집밥과 외식 사이에 배달 문화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대」,「무화과」의 주인공인 조의관의 손자 조덕기, 신문사 영업국장 이원영의 집에는 행랑어멈이 식사 준비를 하여 끼니때마다 상을 내온다.
‘누구나 나왔으면 하고 문전에서 기웃거리려니까 마침 행랑어멈이 벌써 저녁이 되었는지 밥그릇을 들고 나온다(Yum SS 2017,「삼대」 p 111)’
한편,「천변풍경」의 주인공들인 서민층에서는 직접 삼시 세끼를 준비하여 두세 가지 반찬으로 식사하고,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4) 음식 소비의 특수 공간: 절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가장 특수한 음식문화 공간은 절이다. 당시 절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 교외의 식당, 놀이터 역할을 했었다. 조선 요리옥의 형성에 일본 요리옥이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일본사찰에서 손님에게 차와 음식을 내놓는 풍습이 민간으로 내려와 다반옥으로 변화된 것이(Joo YH 2014), 또 다르게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무화과」에는 등장인물들이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택시를 불러 동대문이나 청량리 밖에 있는 사찰을 찾아가 그곳에 부속된 집에서 요릿상을 펼쳐 놓고 노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였다. 1930년대에는 교외였던 동대문이나 청량리 밖의 절들이 지금의 호텔과 식당, 놀이공원이 합쳐진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명월관 출신 기생 이난향의 회고에 의하면 요릿집에서 여흥이 있으면 1∼2원을 주고 콜택시를 불러 한강변이나 아니면 도시 외곽의 절간으로 드라이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이 주로 찾는 곳은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탑골승방과 청량리의 청량사, 동대문 밖에 있던 개운사, 우이동에 있는 화계사 등이었다(Seo ES 등 1973). 염상섭의「무화과」에는 화계사와 탑골승방이 주요 공간으로 등장하고, 동대문 밖이나 청량리 절에 놀러 가자는 내용도 있었다. 경성 교외에 있던 절은 이렇게 숙식은 물론 술과 유흥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1) 소바집
소설 속 인물들은 집밖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식당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했다. 그 식당들 대부분이 일본 국수집이었다. 그래서「삼대」에는 등장인물이 국수를 먹는 장면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대중적인 음식은 국수였다. 쌀에 비해 밀가루는 저렴했고, 먹기에도 간단했다. 당시 일본 소바 집에서는 뎀뿌라 우동 등 국수와 함께 닭고기 얹은 밥도 팔고 있었다. 소바집은 요릿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가볍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다.「삼대」가 집필되던 1930년대 초 경성 거리에는 여기 저기 일본 국수집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병화도 뜨거운 국수를 걸신스럽게 쭈룩쭈룩 먹고 필순이는 그래도 뎀뿌라 우동 한 그릇을 그럭저럭 다 먹었다(Yum SS 2017,「삼대」p 74).’
‘일본 국숫집에 들어가서 전화로 불러 내었다. (중략) 두 사람 몫으로 덴뿌라 우동 두 그릇이 들어온 것을, 채련이는 아침을 오정에나 먹어서 실쭉한 듯이 국물만 마시고는(Yum SS 1997,「무화과」p 604)’
일본 국수집들의 위치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청계천 남쪽, 남산 및 충무로, 진고개 근처에 밀집해 있었으며, 청계천 북쪽인 조선인 거주 지역에도 드문드문 위치해 있었다.
(2) 카페
1930년대에는 현재와 비슷하게 양식당이나 일본식 선술집 혹은 청요릿집을 가리지 않고 맥주를 팔고 있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오뎅, 소금에 볶은 왜콩(땅콩), 오징어 등을 안주 삼아 맥주와 함께 먹었다. 현재와 달리 당시의 카페라 불렸던 곳에서는 커피나 차가 아닌 술과 음식을 중점적으로 판매했고, 시중을 드는 여급이 있었다. 세태소설 속 카페에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본 여성 또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한 조선 여급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 기타
전통적으로 소고기를 즐겨 먹었던 조선인들에게 가장 빨리 영향을 미친 일본 음식은 스키야키였다. 소가 귀해서 식용을 금했던 일본에서는 개항 후 비로소 대중적으로 소고기를 소비했다. 도쿄와 오사카에는 정육점과 우시나베야(쇠고기를 된장으로 끓인 음식)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후 된장으로 끓이는 대신 간장으로 조리는 방식이 개발되어 스키야키의 원형이 탄생했다(Choi IH 2010). 따라서, 1930년대 경성의 일본식당에서는 스키야키를 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대」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음식은 스키야키와 국수 외에도 오뎅, 모찌떡, 센베이 과자, 간즈메(통조림)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통조림은 일본인들에 의해 1892년 제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식품의 산업화가 촉진되면서 통조림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Kim MH 2015). 또한,「삼대」 속 장면을 통해 경성의 고급 일본 식당에서는 음식이 한식처럼 한 상차림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연회용 요리인 가이세키 형태인 코스 요리로 차례차례 나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병화는 오뎅을 반이나 던뻑 떼 물어서 우물우물 씹느라고 미처 대답을 못하다가 반씩반씩 씹는다(Yum SS 1997,「삼대」p 15).’
‘그리고 그는 스끼야끼 냄비에서 고기 한 점을 집어먹고, (중략) “여봐. 술 더웠거든 어서 들여오구, 또 뭐, 간즈메 좀, 안주될 만헌 걸루”(Park TW 2013,「천변풍경」p 359).’
「천변풍경」의 ‘제46절 근화식당’은 우미관 옆 관철동에 있는 일본식 식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사케, 스키야키, 돈까스, 오야꼬 돔부리(닭고기 덮밥), 간즈메(통조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세태소설에 등장하는 일본 음식의 종류와 식공간은 Table 6과 같다.
경성 사람들이 청요릿집에 직접 가는 경우는 한식 요릿집이나 일식 국수집에 가는 것에 비하면 그 빈도가 드물었다는 것을 세태소설들은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청요릿집은 아편과 매음의 온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Kim DS 2017). 청요리는 대부분 배달을 통해 소비되었으며, 서민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던 것이었다. 청요릿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촌과 북촌으로 구분되던 경성 시내 중간 지점인 청인의 거리에 밀집해 있었고, 청인들이 직접 운영을 했다. 세태소설 속에는 등장인물들이 청요리를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청요릿집에서는 자장면, 달걀 국수, 된장국수, 탕수육, 만두 등을 팔았다. 청요릿집의 국수류는 비교적 가격이 싼 편이었지만, 면 종류에 비해 탕수육은 많이 비싸서 서민들이 쉽게 먹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돈에 알뜰한 여자가 된장 국수쯤은 말이 없어도, 탕수육만 해도 객쩍은 과용이라고, 이제까지 함부로 시킬 것을 허락지 않던 것이 생각나, 그래 김 서방은, 오늘은 어떤 일이 있든, 탕수육하고 배갈 반 근은 꼭 시키리라고(Park TW 2013,「천변풍경」p 281).’
염상섭에 비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서민층을 대상으로 소설을 쓴 박태원의「천변풍경」에는 청요릿집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서민들에게 탕수육과 된장국수라 불리우던 자장면은 별식이었다. 세태소설에 등장한 중국음식과 식공간은 Table 7과 같다.
(1) 호텔, 백화점
1917년에 발표된 이광수의 장편소설「무정」에는 일본에서 공부하다 방학을 맞아 황해도 고향으로 가는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이 나와 있다. 그것은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짭짤한 고기가 끼어 있어 전체적으로 특별한 맛은 없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나는 서양 음식’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서양 음식은 조선에 거주한 일부 서양인들을 통해서도 퍼졌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경성부민이 주로 이용한 서양 음식과 식공간은 Table 8과 같다.
1930년대 경성 소비문화의 최정점은 백화점 식당이었다. 박태원은「천변풍경」에서 경성의 부자들이 휴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백화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고 서술하였다.
‘백화점 식당, 그곳은 원래, 그리 불행하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평온무사하게 보낼 수 있었던 사람, 얼마간이라도 행복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사람, 그러한 이들이, 더러는 아내를 동반하고, 또는 친구와 모여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자녀들을 이끌고, 결코 오랜 시간을 유난스럽게 즐기기에는 적당치 않은 이곳을 찾아온다(Park TW 2013,「천변풍경」p 263).’
한편, 서양식 식사 예절은 조선에 있던 외국인들이나 신식문물에 익숙한 소수의 재산가들만 접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무화과」에서 조선호텔 양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서양식 식사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인물을 비웃는 장면이 있다.
‘선생님이 양식을 처음 잡숫는지, 자주 남의 빵을 뜯어 잡숴 가며 수프를 스푼으로 떠 잡숫다가는, 에이 성가시다고 번쩍 들어 훌훌 마시겠지요… 그거나마 소리나 내지를 않았으면 좋으련만, 설렁탕집으로 알았는지, 훅훅 소리를 내지요. 하하하… 게다가 여기저기 돌려다보며, 서양부인네들 유심히 보니까, 저희들도 눈짓을 하고 웃지요! 앉았기가 민망해서 죽을 애를 썼더랍니다. (중략) 원영이는 종엽이를 건너다보고, ‘이런 데 음식은 조선호텔만 바이 못하지요?(Yum SS 1997,「무화과」p 277).’
당시 조선호텔 2층과 미쓰코시 백화점 꼭대기 층에는 양식당이 있었다.「무화과」에는 미쓰코시 식당에서 식사하는 풍경이 두 번, 조선호텔에서 한 번 그리고 길가의 양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두 번 등장했다.
(2) 양식당
「삼대」와 「무화과」에는 경성부 내에 위치한 고급 호텔과 백화점 내 양식당에서 서양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염상섭 소설의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류층이거나 현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계층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서 대화하고 갈등하는 중심 공간 중의 하나로 양식당들이 등장하고 있다. 호텔이나 백화점이 아닌 명치정이나 본정통 등 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도 서양 식당들이 있었으며, 소설 속 인물들은 길을 걷다가 양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주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는「무화과」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부산에서 경성을 오고 가는 기차식당에서도 양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3) 커피 전문점
커피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설은「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구보씨의 하루 동안의 일과를 기록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구보씨는 여러 차례 끽다점, 혹은 다료, 다방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가배차(커피), 홍차, 조달수(소다수), 가루삐스(칼피스) 등 음료와 아이스크림 및 토스트도 팔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커피전문점은 문인, 예술가 등 지식인들이모여 계몽운동을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여 당시의 카페와 구분되었다. 1930년대 영등포에는 대규모 일본 자본의 맥주공장을 비롯해서 빵공장, 우유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맥주, 우유, 커피, 칵테일 등 식음료들이 식생활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되었다(Hong SC 2015).
요약 및 결론
한국 근현대사에서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부딪치며 격동적인 혼융과 변화가 연출되었던 1930년대는 음식문화 측면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 문화와 일본 및 서구의 식생활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이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 재조 일본인이 15∼25%를 상회했던 경성은 빠른 속도로 도시화, 공업화 되어가면서 왕조 시대의 전통적 모습을 탈피하였다.
새로운 식문화가 전통적 식문화와 만나 갈등을 겪으면서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을 당대에 집필된 세태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경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시간적으로 1930년대의 삶을 표현한 대표적인 세태소설 염상섭의「삼대」와 그 속편인「무화과」, 그리고 박태원의 중편소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장편 연재소설「천변풍경」을 선택한 것은, 각각 경성의 상류층(삼대, 무화과), 중산층 지식인(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서민층(천변풍경)의 모습을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세태소설 속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남성이 먼저 독상으로 식사를 한 뒤 여성이 식사하는 풍습이 지속되었지만, 남녀 겸상으로 서서히 변모해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성부민의 계층을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으로 나누어 식생활을 살펴보았을 때 서로 다른 소비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상류층 사람은 대형 요릿집, 호텔과 백화점 양식당을 자주 출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중산층 지식인은 끽다점 혹은 다료, 다방이라고 불리던 커피 전문점 또는 주류와 식사를 판매하는 카페를 자주 이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성의 서민층은 집밥을 만들어 먹었고, 특별한 날에는 국수, 장국, 중국음식 등을 배달시키거나 설렁탕집에서 외식을 했다. 당시 경성은 도시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외식문화가 발달하여 배달 및 테이크아웃 문화가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정에서는 중국음식, 우동, 설렁탕, 양식, 교자상 및 각종 식료품까지 배달 주문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져 활발한 음식배달문화로 발달할 수 있었다. 1930년대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이 상이한 음식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청계천 남쪽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밀집 지역인 남대문통에는 고급 서양식당, 일본식당들과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종로통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 북쪽 지역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던 요릿집 외 전통 한식당들이 있었다. 한식에서 최고급 식공간은 교자상을 내놓는 요릿집이었으며, 장국밥과 설렁탕이 대중화되었다. 유교적 관습 아래 남자들은 독상을 받고 식사를 했었지만, 대중식당이 출현한 이후 계층 구분 없이 어울려 식사하는 문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특수한 음식문화 공간은 절로써 경성 교외의 사찰들은 대부분 종교적 기능 외 교외의 식당, 놀이터 역할을 했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가장 대중적인 일본 음식은 우동으로, 이외에 돈부리, 오뎅, 스키야키, 모찌떡과 연회용 코스요리인 가이세키도 판매되고 있었다. 청요리라 불렸던 자장면, 탕수육 등 중국음식은 대부분 배달을 통해 소비되었으며, 서민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샌드위치, 오믈렛 등 서양 음식은 조선에 거주한 일부 서양인들을 통해서도 퍼졌지만, 대부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1930년대 경성부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세태소설은 수 천 년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전통 음식문화가 일본, 중국, 서양 등 외래의 음식문화와 뒤섞이며 혼성문화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군사적 충돌을 통해 부분적으로 외래의 식문화가 유입된 적이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35년은 타민족을 통한 강제적 교류로 식문화가 전면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전 세계의 식문화가 공존하는 국제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전통적 식문화와 외래의 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만나 변화하는 최초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전통음식의 원형은 외국의 문화코드와 결합된 글로컬 문화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Bae ES 2010). 한식의 현지화를 열린 시각으로 수용하는 한식 세계화의 시초는 1930년대 경성 부민의 식생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당대에 집필된 세태 소설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한식 세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체적 입장에서 이질적인 식문화를 수용하고 융합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Bang MK 2009). 한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식문화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상이한 식문화가 혼합되어 형성된 한국의 글로컬한 음식문화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식 세계화를 이루는 발판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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