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과 유물로 재구성한 중국의 시대별 부엌의 모습 : ‘불’과 ‘솥’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 론
이 논문은 중국의 식공간을 시대별로 정리, 고찰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런데 한 지역의 식공간(食空間)을 이야기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첫째, 식공간 중 무엇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인가? 우리가 식공간이라 칭하는 단어에는 ‘취사(炊事) 공간’과 ‘취식(取食)공간’이라는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두 공간을 엄격히 구별하거나, 구별하지 않는 문화가 지역별로 다양하게 분포한다. 예를 들어 산시성(山西省) 일대에 분포하는 ‘요동(窯洞)’은 지하 동굴 형태의 주거지로서 부엌이 취사공간이자 취식 공간이며, 취침 공간 및 기타 일상생활공간이 된다. 그러나 하얼빈(哈爾濱)에서는 부엌에서 밥을 하되, 거실이나 방 등에서 상을 펴서 밥을 먹으므로 취사 공간과 취식 공간이 엄격하게 구별된다. 따라서 중국의 식공간을 고찰할 때에는 그것이 취사 공간인지, 취식 공간인지 반드시 구별해 서술해야 하는데, 본고에서는 제목에서 밝힌 대로 ‘부엌’ 즉 취사 공간을 위주로 논하고자 한다.
둘째, 취사 공간인 부엌의 역사를 고찰하되 어느 요소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인가? 필자는 부엌의 중심요소는 ‘솥’과 ‘불’이라 생각한다. 솥, 특히 중국의 솥인‘과(鍋)’는 흔히 ‘웍(wok)’이라고 부르는 조리 도구이다. ‘웍’은 ‘팬(pan)’이나 ‘팟(pot)’ 등과 구별하기 위해서 서양에서 붙인 명칭으로 ‘볼(bowl)’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찌기, 삶기, 볶기, 튀기기, 데치기, 끓이기 등을 모두 할 수 있다. 문헌 통계에 따르면 선진(先秦)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는 솥을 의미하는 글자로 ‘정(鼎)’을 많이 썼으나, 당대(唐代)에 이르러 ‘확(鑊)’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과(鍋)’의 경우 당대에는 낮은 빈도로 사용되다가 점차 다용되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이 글자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자는 단순히 조리 도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에서 집들이를 뜻하는 단어가 ‘요과저(燎鍋底)’, 즉 새 집에서 새 솥에 불을 때어 밥을 해 먹고 화로에 재와 연기를 쐬도록 한다는 뜻의 낱말인 것이나, 청대(淸代)의 밀주 금지법이 ‘소과(燒鍋) 금지법’, 즉 솥에 불을 때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라 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솥은 생활 속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이자 삶의 중심 요소이기도 하다. 한편, 음식을 조리함에 있어 ‘불’이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나라 이전에 이미 ‘팽인(亨人)’, 즉 ‘정(鼎)’과 ‘확(鑊)’를 갖추고 물과 불을 조절하여 부엌에 공급하는 전문가가 있었다는 『주례(周禮)』의 기록이나, “사람들은 화식(火食)에 의지하므로 질병과 수명이 거기에 달려 있다. 네 계절마다 수목(燧木)을 뚫어 새 불을 취하는데 기후에 따르되 단절됨이 없도록 한다.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는…봄에 취한다. 살구나무와 대추나무는…여름에 취한다. 떡갈나무와 졸참나무는…가을에 취한다. 홰나무와 박달나무는…겨울에 취한다. 뽕나무와 산뽕나무는…늦여름에 취한다(人之資於火食者, 疾病壽夭系焉. 四時鑽燧取新火, 依歲氣而無亢. 楡柳…春取之. 杏棗…夏取之. 柞楢…秋取之. 槐檀…冬取之. 桑柘…季夏取之).”라는 원(元) 가명(賈銘)이 쓴 『음식수지(飮食須知)ㆍ수화(燧火)』의 기록, “음식을 익히는 법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불 조절이다. 반드시 센 불이 있어야 하는 경우는 지지고 볶는 것으로, 이 때 불이 약하면 음식이 맛이 떨어진다. 반드시 약한 불이 있어야 하는 경우는 고아서 끓이는 것으로, 이때 불이 세면 음식이 말라 버린다. 처음에 센 불을 쓰고 나중에 약한 불을 써야만 하는 경우는 육즙을 가두어야 하는 음식으로, 성급하게 다루면 겉은 마르고 속은 덜 익게 된다.…불을 꺼트려서 다시 익히면, 기름기가 빠지고 맛이 없어진다(熟物之法, 最重火候. 有須武火者, 煎炒是也, 火弱則物疲矣. 有須文火者, 煨煮是也, 火猛則物枯矣. 有先用武火而後用文火者, 收湯之物是也, 性急則皮焦而裏不熟矣.…火熄再燒, 則走油而味失).”라는 청(淸) 원매(袁枚)가 쓴 『수지단(須知單)』의 기록을 보아도 옛사람들이 부엌의 불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셋째,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부엌에서 바쁘게 취식까지 해결해야 했던 신분의 사람이라면 별도의 취식 공간이 무의미할 것이며, 겨우 구한 홍당무를 허겁지겁 먹어야 하는 빈자(貧者)라면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과 취사 공간이라는 그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Fig. 1). 따라서 보다 정치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고려하여 부엌의 모습을 논해야 하겠지만, 불과 솥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지 않은 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시대에만 해도 완성된 음식, 그리고 음식이 차려진 연회석상이라는 결과물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음식이 조리되는 과정과 취사 공간인 부엌의 모습이 기록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고려해서 각 시대의 부엌을 설명하려고 해도 자료가 부족하여 적절한 비교 대상을 설정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각 시대별로 존재하는 유물과 문헌 자료를 망라해서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이라 판단된다.
요컨대 본고에서는 현존 문헌과 유물을 근거로 ‘불’과 ‘솥’의 변화를 중심으로 중국 부엌의 변천을 거칠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론 - 각 시대별 부엌의 모습
1.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구석기인들이 혈거(穴居)에 불을 놓고 음식을 익혀 먹었다면, 신석기인들은 흙으로 빚은 솥과 흙으로 빚은 화로를 사용했다. 허난성(河南省)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 부뚜막의 경우 솥과 화덕이 연결된 형태라 ‘연부조(連釜竈)’라고 부른다. 이 유물은 당시에 곡물 등을 끓여서 먹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한편, 불을 때는 위치가 이동할 수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2. 은대(殷代: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1세기)
은상(殷商: 기원전 1300년 경 이후) 때에 주목할 만한 조리도구가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언(甗)’이라는 청동기였다. 이는 아래는 끓이고 위는 찔 수 있는 형태, 즉 솥과 시루를 결합한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전 시대에 비해 취사도구들이 결합하고 열전도율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해준다. 출토된 ‘언’ 중에 특이한 것이 있는데, 바로 세 개의 시루가 장방형 구조물처럼 생긴 솥 위에 얹어진 유물이다. 장방형 구조물이 솥 역할을 하여 그곳에 물을 넣고, 그 아래에 불을 지피면 위에 얹어진 시루 안에 들어 있는 음식물 세 가지를 동시에 찔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3. 서주시대(西周時代: 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0)
이 시기 출토 문물 중에는 닭, 물고기, 고기를 담는 ‘정(鼎)’, 쌀과 기장을 담는 ‘두(豆)’, 술과 음료를 담는 ‘호(壺)’가 있다. 또, 세 개의 발이 달린 솥으로는 ‘정(鼎)’뿐만이 아니라 ‘력(鬲)’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둘의 모양은 큰 차이가 없으나 ‘력’은 진한대(秦漢代)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부엌은 무엇이라 칭했을까? 주나라 말엽이 되면 부엌을 뜻하는 단어로 ‘주(廚)’가 사용되었다. 이는 고대 부엌을 ‘포옥(庖屋)’이라 한 여러 기록과 ‘주(廚)’가 등장하는 『맹자(孟子)』의 기록을 비교한 결과이다.
이 시기의 음식 문화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시경ㆍ대아ㆍ항위(行葦)』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자리 깔고 안석 놓고, 심부름꾼들은 안석을 나르네. 어떤 이는 술 권하고 어떤 이는 술 받으며, 잔 씻어 술잔 바치고, 고기 장조림을 내놓는데, 구운 고기도 있고 구운 간도 있으며, 맛난 안주로 순대도 있나니,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북을 치네(肆筵設席, 授几有緝御. 或獻或酢, 洗爵奠斝, 醓醢以薦, 或燔或炙, 嘉殽脾臄, 或歌或咢).”
이 시는 당시에 신분이 높은 남성들이 식사할 때 자리에 앉아 안석에 기대었음을 말해주는데,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안석에 기대고 각자 독상을 받아 식사하는 이른바 ‘분찬(分餐)’을 행하였다고 한다.
4.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221)
당시의 불과 솥은 이전 시기와 대동소이했으나, 음식 문화는 더욱 발전하였다.
이때 이미 주식과 부식의 구별이 있었는데, 『논어ㆍ향당(鄕黨)』에 “공자님은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드시지는 않으셨다(肉雖多, 不使勝食氣).”라 한 것으로 보아 곡물을 주재료로 하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고기는 부차적인 반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각종 조미료가 간과 맛을 맞추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실린 소공(昭公) 20년(기원전 522)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안자(晏子: 기원전 578∼기원전 500)는 “마음을 맞추는[화(和)] 일은 ‘국(羹)’를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국은 ‘물’, ‘불’, ‘초(醯)’, ‘식혜(醢)’, ‘소금’과 ‘매실’로써 생선이나 고기를 끓이는데 나무를 때서 만들고, 음식 만드는 사람이 맛을 맞춥니다[화(和)]. 양념으로 맛의 부족함을 채우고 지나치면 덜게 합니다.”라 말하였는데, 이로 볼 때 당시에 소금, 매실산 및 각종 양념을 다양하게 사용할 정도로 조리법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전국시대에 이르면 투박하나마 철제 취사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조리법 발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5. 한대(漢代: 기원전 206∼기원후 220)
한나라 때에 솥과 불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방의 형식이 시작되어 중국전통주방의 기본 구성 및 구조가 마련되었으며, 철 솥이 민간에도 보급되고 조리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부뚜막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졌던 것이다.
당시의 솥을 먼저 살펴보자. 전국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철제 솥은 이 시대에 이르러 부잣집에서부터 보통 민가에까지 전해졌다. 그 중에서도 다섯 가지 다른 재료를 동시에 조리할 수 있도록 칸이 나누어져 있는 ‘오숙부(五熟釜)’, 솥바닥이 얕고 불과 접촉면이 넓어 밥이 빨리 되는 전장용 솥인 ‘제갈량과(諸葛亮鍋)’ 등이 주목할 만한 유물인데, 이는 용도에 따라 형태가 다른 철제 솥을 사용하게 되었음을 입증한다.
부뚜막의 경우, 거의 완정한 형태의 것이 등장하였다. 여러 자료들 중 눈여겨 볼 것으로서 산둥(山東) 주청현(諸城縣)에서 발견된 포주도(庖廚圖) 라는 화상석(畵像石)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부엌 안팎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조리와 관련된 각종 행위들을 한 폭 안에 묘사하였다. 먼저 왼쪽 중간 부분을 보면 부뚜막 앞에 한 사람이 앉아 나무를 넣어 불을 조절하고, 다른 한 사람이 아가리가 큰 ‘확’의 음식을 조리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이 부뚜막은 화안(火眼)이 하나이며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통이 갖춰져 있고,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이후 시대의 부뚜막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형태가 완벽하다. 다음으로 Fig. 5를 보면 사람들이 고기를 꼬치에 꿰어 이동형 화로에서 굽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볼 때 당시 사람들은 이미 어떤 음식을 만드느냐에 따라 부뚜막과 이동형 화로를 구별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뚜막의 또 다른 예는 한나라 때의 무덤 부장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부뚜막 모형이 중요한 것은 화안에 얹어진 시루의 크기와 모양이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음식의 조리 기법과 종류, 재료가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또, 이 부뚜막 옆에는 솥이 걸려 있는 것처럼 붙어 있는데, 이 솥은 아마도, 부뚜막 위에서 주된 음식을 조리하는 동안 그 열을 이용해 물을 미리 끓이거나 데워놓는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한 번 부뚜막에 불을 지피되 조리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였던 것이다(Fig. 6).
6.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
이 시기 음식을 이야기할 때 속석(束晳: 264?∼303)의 「병부(餠賦)」를 빼놓을 수 없다. “삼춘의 초기에는 음과 양이 교차되는데, 한기는 이미 사라졌어도 온기는 아직 한창에 이르지 못한 상태다. 이때에 연회를 차릴 경우라면 만두가 알맞다.…한겨울 맹추위에 새벽에 모일 때면, 콧물이 코 안에서 얼고 입 밖으로 입김이 나온다. 허기를 채우고 덜덜 떨림을 해결하려면 탕병(국수)이 최고다.…사시사철 쓰고 알맞지 않을 때가 없는 음식으로는 오로지 뇌환, 즉 소를 넣은 경단을 꿀이나 탕에 띄운 음식뿐이지 않을까(三春之初, 陰陽交際, 寒氣旣消, 溫不至熱. 於時享宴則曼頭宜設.…玄冬猛寒, 清晨之會, 涕凍鼻中, 霜成口外. 充虛解戰, 湯餠爲最.…四時從用, 無所不宜, 唯牢丸乎?)?”를 보면 당시 가루로 만든 음식인 ‘병(餠)’이 만두(曼頭), 탕병(湯餠), 뇌환(牢丸) 등으로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음식들을 만드는 불과 솥은 어떠했을까? 이 시기의 솥과 불은 이전 시대의 것을 답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진(東晋: 317∼420) 때 만들어진 부장품인 ‘유도조(釉陶竈)’, 즉 도자기 부뚜막의 형태를 보면 네 개의 화안을 가졌지만 한나라 때의 부뚜막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7. 당대(唐代: 618∼907)
당나라 때의 부엌 역시 이전 시대의 것과 대동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 지어진 시문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향유했던 음식이 매우 다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여러 자료 중 송대(宋代)에 편찬된 『산가청공(山家淸供)』을 참고할 만한데, 이 책에서는 각종 조리법을 설명하면서 관련된 시문을 인용하였다. 그 중 당대 두보(杜甫)의 시에 나온 ‘괴엽냉도(槐葉冷淘)’라는 국수의 조리법을 소개한 부분을 살펴보겠다.
“두보의 시에 ‘푸르디푸르고 높다란 홰나무의 이파리를, 따고 거두어 주방에다 분부하네. 가까운 시장에서 새로 나온 밀가루를 사오면, 홰나무 즙으로 물을 들여 완연히 서로 어우러지게 하네. 솥에 넣어 재료를 푹 익혀서, 반찬을 곁들이면 근심이 사라질 지경이 되네.’라 했다. 여기에서 그 조리법을 볼 수 있나니, 여름에 홰나무 이파리 중 고운 것을 따서 탕에 조금 담갔다가, 곱게 갈아 체에 걸러 파란 물을 얻어, 밀가루와 어우러지게 하여 ‘도(淘)’라는 것을 만들고, 여기에 초장으로 버무린 잘게 자른 고기를 만들어, 고운 자리에 모아, 담아서 내놓으면, 그 선명하게 푸른 것을 먹고 즐길 만하다(杜甫詩云, ‘青青高槐葉, 采掇付中廚. 新麵來近市, 汁滓宛相俱. 入鼎資過熟, 加餐愁欲無.’ 即此見其法, 於夏采槐葉之高秀者, 湯少淪, 研細濾清, 和麵作淘, 乃以醯醬爲熟齏, 簇細茵, 以盤行之, 取其碧鮮可愛也).”
괴엽냉도는 당나라뿐만 아니라 송나라 시인들의 시에도 곧잘 등장하는 별미였는데, 일종의 여름나기 음식이었던 듯하다.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조리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8. 송대(宋代: 960∼1279)
송대는 음식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로 중국의 음식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식사도구의 주류가 도자기가 되었고, 자기를 애호했던 당시 사람들의 기호 때문에 경쟁적으로 자기의 품질도 상승했다. 또, 철로 만든 솥이 이전 시대보다 널리 보급되어 조리에 다용되었다. 철제 솥이 보편화 되었다는 것은 ‘볶는다’라는 고급 조리 기술의 보편화를 의미하기에 특히 중요하다. 당시의 그림 중 「낙병도(烙餠圖)」를 보면 한 여성이 반죽을 밀고 다른 한 여성이 번철 같은 솥에 그것을 지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솥을 이용한 조리 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Fig. 7).
그런데 당시의 음식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차’였다. 물론 당나라 때에도 차를 마셨지만 차가 너무도 고가였기에 함부로 먹을 수 없었고, 차에 소금이나 계피 등을 첨가하여 마시는 등 차의 진정한 맛을 즐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면 차를 재배하여 병차(餠茶)로 만드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를 즐길 줄 아는 인구도 그만큼 늘어났다. 소식(蘇軾: 1036∼1101)의 여러 시에는 당시 사람들의 차를 다루는 섬세한 손길과 기술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 그 예로 120구 장편 고체시 「주안유에게 차를 보내다(寄周安孺茶)」 중 일부를 살펴보자. “이로부터 강호로 들어가, 고요히 지내는 승려를 찾아다녔는데, 승려들은 정말 한가하다보니, 차를 탐구하여 매우 익숙하였지. 듣건대 이른 봄날, 바구니 들고 해가 막돋을 때 달려가서, 경칩에 꽃봉오리도 터지기 전에, 따고 따도 한 움큼이 안 될 만큼인 그것을, 곧바로 씻어서 맑은 물로 찌면, 향기가 내재된 듯, 삽시간에 가벼운 명주에 퍼지나니, 불은 강약을 잘 조절하고, 잠깐의 수고를 귀찮아해서는 안되나니, 때를 놓치면 보관하다가 상해버린다네. 압착하는 검붉은 대통은 깨끗하고 옻칠 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널어 말리는 대바구니는 짜임이 고르고 뚜껑이 있는 것으로 하네. 장맛비의 습기가 제일 무서우니, 사람의 온기처럼 따뜻하게 해두어야 하리. 좋은 차는 강직한 사람과 같아서, 조그마한 불순물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지조 있는 선비의 마음과 같아, 조금의 더러움으로 어지럽히기 어려우리(自爾入江湖, 尋僧訪幽獨. 高人固多暇, 探究亦頗熟. 聞道早春時, 攜籯赴初旭. 驚雷未破蕾, 采采不盈掬. 旋洗玉泉蒸, 芳馨豈停宿. 須臾布輕縷, 火候謹盈縮. 不憚頃間勞, 經時廢藏蓄. 髹筒淨無染, 箬籠勻且復. 苦畏梅潤侵, 暖須人氣燠. 有如剛耿性, 不受織芥觸. 又若廉夫心, 難將微穢瀆).”
차를 중시하고 좋아하는 북송 사람들의 모습은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중 물가의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대 요(遼: 907∼1125)의 무덤 벽화에 묘사된 차 끓이는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요나라의 이 무덤 벽화를 보면 연꽃잎이 표현된 아름다운 화로에 은병을 얹어 차를 넣을 물을 끓이는 모습이 보이는데, 차를 끓일 물은 온도 조절이 중요하므로 화로를 따로 준비하고 물의 잡맛을 없애주는 좋은 병을 얹어 물을 끓였음을 알려준다.
9. 명대(明代: 1368∼1644)
솥과 관련된 명나라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元)나라가 멸망한 후, 몽고족들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해 명나라에서 솥을 수입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제련된 철제 솥을 녹여서 무기로 만들 것을 염려한 명나라 조정은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철솥과 황강철 제품 등이 유통되는 것은 모두 엄금한다. 시장은 대동진(大同鎭)에서만 연다. 시장은 매 해 한 번만 열고, 한 번에 이틀 이상 열 수 없다.” 이 법률 때문에 몽고족들은 철제 솥을 얻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써야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명나라 사람들이 철제 솥을 주조하는 기술을 특화하였음을 말해주는데, 당시에 솥을 어떻게 주조했는지는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여러 삽화가 있는데, 그 안에 묘사된 부엌의 모습을 주목할 만하다. 기름을 짜기 위해 씨를 볶는 그림을 보면 벽돌로 부뚜막을 쌓되 위쪽에 화안을 두 개 만들고, 그곳에 시루와 솥을 얹어 씨를 찌고 볶고 있다. 목조 건축물에서 건축물의 수명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 부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벽돌로 만든 견고한 부뚜막이 왜 필요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실제 부엌은 가옥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명나라의 부엌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는 건축물이 안회이성(安徽省) 회이저우(徽州)에 있다. 이 일대에 군집한 건물들은 회이저우의 전통가옥으로서 명대 건축물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건축물이 명대의 양식을 유지하였다고 하여 내부의 부엌에 청나라 양식의 영향이 가해지지 않았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도인 북경에서 비교적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건축물의 원형이 크게 변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건물의 부엌 역시 명대의 양식을 조금이나마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곳의 부엌은 다양한 위치에, 한 집안의 여러 곳에, 유선형의 부뚜막을 갖춘 형태로 배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한 건물 안에 여러 개의 부엌이 딸린 ‘다주방(多廚房)’의 사례는 제주도의 ‘안거리-밖거리가 있는 가옥’에서도 확인되는데, 아마도 부엌이 여럿인 회이저우의 가옥 역시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분가한 자녀들이 따로 음식을 조리하도록 부엌을 여럿 배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10. 청대(淸代: 1644∼1911)
먼저 청나라 궁중의 주방을 살펴보겠다. 청나라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했던 곳은 ‘어선방(御膳房)’이었다. 어선방은 각기 담당하는 음식과 조리 과정에 따라 담당자가 달랐고 그 인원도 많았다. 고기, 생선, 알류 등의 음식을 담당하는 홍안(紅案)이라는 부서에는 굽기, 튀기기, 끓이기, 데치기 등 조리방법을 달리하는 전문 인원이 배속되었고, 이때에는 각자 화로를 따로 썼다. 예를 들어 닭고기를 조리하는 담당자와 그의 화로에서는 오리고기를 조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곡물류를 조리하는 백안(白案)이라는 부서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도광(道光) 황제(재위 1821∼1850)가 갑자기 중국식 수제비인 편아탕(片兒湯)을 해오라고 분부를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음식은 준비되지 않았고 주방에서 다시 고하길 “수제비를 끓이는 화로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즉, 수제비를 담당하는 부문과 화로가 없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조리사들은 “꼭 드시고 싶다면 저희가 계획을 잡아 예산을 짜고 수제비 화로를 따로 준비하겠나이다.”라고 고하였다.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에 따라 어선방의 직책이 세분화되었으나 그만큼 담당하지 않은 음식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모순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화로를 따로 썼던 것 같지는 않다. 청나라 말엽 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태후(西太后)를 모셨던 주방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리 도구와 조수들도 구분 없이 사용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여러 황제들이 미식가였지만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6)는 청나라의 음식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미식가였던 그는 정찬 때마다 40∼50가지의 음식을 받아 다양한 음식을 즐겼다. 청나라에서는 황제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었고, 그 음식을 누가 조리했는지까지 기록하였는데, 그 중 건륭제가 1765년 2월 15일 묘시(卯時)에 먹은 음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당시 건륭제는 중국의 강남지방을 순행 중이었는데, 그는 배 위에서 아침식사를 먹었다. 접고 펼 수 있는 이동식 식탁 위에 초계가상잡회열과(炒鷄家常雜膾熱鍋), 연와압사(燕窩鴨絲), 양육편(羊肉片), 즉 뜨거운 솥에 넣은 여러 재료를 넣어 볶은 가정식 닭요리, 실처럼 가늘게 찢은 오리고기가 들어간 제비집 요리, 양고기 편육 등의 음식이 올랐다. 그런데 이 중 ‘초계가상잡회열과’라는 음식에는 ‘열과’라고 하여 ‘뜨거운 솥’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가정식으로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볶은 닭고기를 뜨겁게 데운 솥에 내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청나라 때가 되면 음식 이름에 솥이라는 담아내는 용기까지 표기되기에 이르렀다.
청대 민간의 부엌의 모습은 이전 시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청대 관료의 집안에 설치된 신당(神堂)에서 기도를 드리는 그림을 보면 신당 너머로 명대의 것과 차이 없어 보이는 부뚜막의 일부 모습이 그려져 있다(Fig. 10). 당시 부뚜막에는 찬장으로 쓰일 수 있는 구조물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이 공간은 중국인들에게 조왕(竈王)에게 가정의 발복을 비는 공간으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결 론
이상 솥과 불의 변화를 중심으로 시대별 중국 부엌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솥과 불의 변화는 음식문화의 발전을 이루게 했고, 또 음식문화의 발전이 솥과 불의 변화를 이끌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급속도로 다변화한 중국 부엌의 모습을 다루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중국 부엌의 모습을 바꾼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대약진운동(1958∼1962)을 말할 수 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인민공사에서 모든 인민이 함께 급식을 먹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사실상 각 가정의 부엌이 이전 시대까지 담당하였던 조리와 취식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음식문화 또한 많은 부분 바뀌게 되었다. 이 같은 청대 이후 부엌의 변화는 추후의 논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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